다산 정약용 장편서사시 "햇빛"|360행으로 다산시중 최대작품|유배때 한 여성의 비극적운명 묘사통해 사회고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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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다산 정약용(1762∼1836)의 한시중 최대 작품인 3백60행의 장편서사시『소경에게 시집간 여자』(도강고가부사)가 발굴돼 문단및 학계에 관심을 모으고 있다.
연암 박지원의 제자로 문명을 날리던 이덕무·이서구·박제가·류득공의 시모음집인『사대가』의 한필사본 말미에서 이 작품을 최근 발굴한 임형택교수(성균관대 한문교육과)는 『창작과 비평』겨울호에 실릴「다산시의 현실주의 재인식」이라는 논문에서 필치나 주제의식, 자료적 정황으로 보아 다산작이 확실 하다고 주장했다.
현재 남아있는 총2천5백여수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다산시에도 불구하고 1811년부터 8,9년사이의 작품이 망실돼 다산시의 전모를 파악하는데 온전치 못한 실정에서, 또 현실주의 문학관이 전면으로 부각되고있는 이 시대정신에 비추어 조선조봉건사회의 내적모순을 사실적 수법으로 파헤치고 있는 다산시 발굴은 소중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수있다.
전라도 강진에 유배된 1891년부터 다산은 그곳 농·어민들의 생활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린 『탐진촌요』『탐진농가』『탕진어가』등 연작시 3편과『애절양』등을 지었는데 이 작품들은 방대한 다산시 목록 가운데 가장 빛나는 대목이고 또 우리의 현실주의 문학발전의 획기적인 몫으로 인정받고있다.
이번 발굴된 『소경에게 시집간 여자』또한 그 무렵에 쓰여진 작품으로 사실주의적 수법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소경에게 시집간 여자』는 다산이 이 작품의 서두에서 『가경 계해년(1803)금능(강진의 별칭)서 귀양살이 할때 강진의 소경 아내의 사실을 취해 한편을 만들었다』고 밝혔듯 작중의 사건을 실제로 목격하고 애처로움에 충격을 받아 장편의 서사시로 쓴 것이다.
이 시는 한여성의 비극적 운명을 그린 것으로 공간은 강진읍내의 어느 거리다. 그곳에서 중의 행색을 한 한 젊고 아리따운 여자가 종2명에게 강제로 끌려가고 있다.
옆에는 어머니로 보이는 여인이 따라온다. 시인이 무슨 영문인지 묻자 젊은 여자는 목이 메어 말을 못하고 어머니가 대신 나서 사정을 들려준다. 한창 꽃처럼 피어난 18세 처녀가 가난한 환경탓에 팔려가다시피 부자집 늙은 소경에게 시집가니 전처 소생의 두딸과 아들이 갖가지 구박과 모함을 한다.
게다가 소경 늙은이까지 모진 학대를 가해 시집을 지옥보다 험하고 철창보다 고달픈 공간으로 만든다. 이 생지옥으로부터 탈출을 꾀한것이 중이되는 길이었다.
그러나 이 막다른 중의길에서 마저 소경에게 붙잡혀 관가로 끌려가는 것이 이 시의 현재적 시점이다.
이와 같은 작품대강의 줄거리를 다산은 시인의 직접적인 개입에 의한 서술·묘사·설명 없이 전편을 극적인 전개방식으로 처리한 것이 구성상의 특징이라고 할수 있다.
이는 마치 현대소설이나 영화에서 보는 장면제시적 수법을 연상시킬정도여서 「정확하게 관찰하고 정확하게 그린다」는 다산의 사실주의문학관의 구현으로 볼수 있다.
『소경에게 시집간 여자』에서 다산은 인간의 기본권이 무참히 짓밟힌 비극적 운명을 그리고 있다.
늙은 소경의 경우 부를 이용한 여성의 인격을 빼앗고 아버지의 경우 가장의 위치에서 자신의 물질적 안락을 위해 딸을 희생시킨다.
그리고『남편을 헌신짝처럼 팽개치다니/지금부터 다시 머리 기르고/부부간 금슬 좋게 지내라』는 강진고을 원님 판결대로 원님은 여성에게 순종만 강요하는 봉건윤리의 아성이요, 또 소경으로부터 뇌물받은 부패관료의 상징이다. 요컨대 비극은 기본적으로 빈부의 모순에서 발단하였고 그 모순은 봉건윤리에 의해 제도화돼 있다는 것이다.
시인은 한 여인의 비극적 운명에 대해 연민의 정을 느끼며 그렇게 만든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이 작품의 주제사상이라 할수 있으며 이같이 봉건사회에서의 소외계층에 애정을 갖고 묘사함으로써 사회적모순을 자연스럽게 떠올린 것이야말로 다산의 현실주의문학관의 요체라 할수 있다.
또 실감있는 표현을 구사해 작품의 형상성을 높인점, 여러가지 풍속도를 상세하게 묘사해 작품내용을 생활과 밀착시켜 풍부하게 해주면서 조선적 정조를 살린점, 시구를 평이하게 엮으면서 일상생활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 표현상의 특장으로 지적된다. 또 서사를 위주로 하고 있으면서도 서사적 과정속에 정감을 농축시켜가며 서사와 서정을 교직한것도 심대하고 독특한 효과를 얻고 있다. <이경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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