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 꼴찌에서 세계 무대 주인공으로… 테너 김건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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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 피어난 재능으로 세계 무대에서 주목받고 있는 테너 김건우. [사진 티엘아이 아트센터]

“건우, 너는 주역이야.” 지난 5월 런던의 로열 오페라 하우스. 테너 김건우(33)가 들은 말이다. 그는 이 오페라 극장에서 운영하는 영아티스트 프로그램의 2년차 성악가다. 보통 영아티스트에게는 오페라의 작은 역할 또는 메인 성악가를 대신하는 커버 역할이 주어진다. 하지만 극장 측은 2019년 올리는 도니제티 오페라 ‘연대의 딸’ 주역인 토니오 역을 김건우에게 줬다. 테너들을 일약 스타로 만드는 아리아 ‘친구여, 오늘은 기쁜 날’을 부르는 역할이다. 고음(高音)의 척도라 할 수 있는 하이 C(가운데 ‘도’음에서 두 옥타브 위의 ‘도’)가 여러번 나온다.

2015년 몬트리올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하고 이듬해 플라시도 도밍고 국제 콩쿠르인 오페랄리아에서도 우승하면서 그의 상승곡선은 시작됐다. 도밍고의 내한 공연에서 함께 노래했고 지난해엔 로열 오페라 하우스의 영아티스트 프로그램에 선발됐으며 내년엔 메인 무대의 주역까지 맡게 됐다. 정확하고 청량한 김건우의 고음을 연상시키는, 가파른 상승 곡선이다.

이 성공은 상대적으로 드라마틱하다. 본인의 말에 따르면 “확 내려갔다 여기까지 올라왔다.” 열살도 되기 전부터 성악가가 되고 싶었고 중학교 과정인 예원학교 입시 시험을 봤다. 탈락이었다. 중3에 변성기가 와서 예술고등학교는 응시 못했다. 음악대학 입시도 낙방했고 재수해 들어간 학교의 첫번째 실기시험에서 성악과 전체 꼴찌를 했다

“어려서 교회 성가대를 했는데 목소리가 너무 커서 번번이 지적을 받았을 정도로 성량이 컸어요. 높은 음이 낮은 음보다 편했을 정도였고, 10대엔 별로 배우지 않고도 하이 C를 그냥 냈어요.” 그는 “내가 잘 한다는 자신감이 분명히 있었는데 늘 결과가 안 좋았다”고 했다. 하지만 숱한 탈락에도 노래는 계속 했다. “내 소리를 들려주는 게 좋고, 관객이 내 노래를 듣고 딱 통하는 순간이 정말 좋아요.”

경력의 극적인 반전은 언제 어떻게 시작됐을까. 그는 “솔직히 말하면 되게 웃긴 얘기가 될 수 있는데…”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이 발단이었다. “몬트리올 콩쿠르를 준비하면서 김연아 선수의 경기를 봤어요. 압도적으로 잘하게 보이는 이유가 뭔지 계속 찾다가 갑자기 튀어오르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는 “가장 어려운 기술을 구사하는 순간에 어려움이 보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냈다. 이후로 연습 방법, 음악에 대한 접근이 바뀌었다. 어려운 부분, 고음에서 소리를 들려주는 게 아니라 텍스트와 감정만 보이도록 하는 데 집중했다. 이후 거짓말처럼 출전한 콩쿠르마다 우승했다. 첫 우승 전까지 나갔던 콩쿠르에서는 결승 진출 단 한 번과 수많은 예선 탈락을 겪었던 그였다.

“김연아에 감사한다”며 웃지만 사실 그 깨달음의 순간이 우연히 찾아온 것만은 아니다. 경희대를 졸업한 그는 2014년 독일 마인츠로 유학을 떠난 후 “날갯짓부터 배워서 혼자 날아야 하는 심정이었다”고 했다. “헛갈리기 시작했어요. 한국에서는 선생님들 하라는 대로 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독일에서는 혼자 생각해봐야했거든요.” 레슨 장면 등을 녹화해 여러번 보면서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철저히 분석해봤다. 혼자 날아보려는 고민이 치열하던 와중이었기 때문에 불쑥 나타난 피겨 스케이팅도 그를 바꿀 수 있었다.

테너 김건우

‘연대의 딸’ 캐스팅에서도 알 수 있듯 김건우의 현재 위치는 아름답고 튼튼한 고음 테너다. 그는 “그게 나의 장점안 줄은 알지만 고음으로만 부각되는 게 부담스러울 때도 있어요”라고 했다. “중간음에서 나오는 특별한 색깔과 질감을 가지고 싶어서 많은 노력을 하고 있어요. 그래야 진짜 음악이 나오니까요. 이게 2015년 이후 해결 중인 숙제에요.”

아이가 셋이고 막내가 두 살인 김건우는 로열 오페라 하우스의 프로그램이 내년 끝나면 프리랜서 성악가로 세계 무대에 용감히 나서야 한다. “무대 욕심은 없지만 역할 욕심은 많다”는 그는 “내 목소리를 지킬 수 있는 역할을 맡아가며 오래 노래하고 싶다”고 했다. 김건우는 11일 오후 5시 성남 티엘아이 아트센터에서 국내 첫 독창회를 연다. 내년 런던에서 출세작이 될 ‘연대의 딸’ 아리아 등을 부른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