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60 놀이문화 달라졌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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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압구정동의 한 클럽에서 2일 열린 'CEO를 위한 네트워킹 파티'에서 참석자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강정현 기자

"내 인생은 나의 것…."

40대 이상 중년 남자들의 놀이문화에도 새 바람이 불고 있다.

2일 저녁 서울 압구정동의 한 지하 클럽. 노란색 넥타이나 분홍 스카프로 단장한 40대 이상의 남녀 150여 명으로 북적였다. 와인잔을 들고 서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가수의 노래에 맞춰 몸을 흔드는 참석자들의 연령대는 40대 초반부터 60대까지. 그중에서도 50대가 주류였다. 이 자리는 중년을 대상으로 한 '제1회 CEO를 위한 네트워킹 파티'. 저녁식사-술-노래로 이어지는 접대문화에 익숙한 중년 남성들에겐 다소 낯선 자리였다.

홍재우(53.건설업)씨는 "술 마셔야 다음날 머리만 아플 뿐 즐겁게 노는 건 아니지 않으냐"며 "자신을 위해 즐길 수 있는 자리가 마련돼 기쁘다"고 말했다.

회사원 정찬현(53)씨도 "이런 파티는 일부 상류층이나 하는 줄 알았는데, 뜻만 맞으면 누구하고나 어울릴 수 있다는 게 재밌다"고 했다.

치열한 경쟁에 시달리며 앞만 보고 살았던 40, 50대 중년 남성들이 온.오프 라인을 통해 다양한 놀이문화를 마련 중이다. 회사 일과 자식 뒷바라지에 치여 즐길 줄 몰랐던 중년들이 이제 '인생의 재구성'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 댄스스포츠로 '사추기' 극복=이돈(40.의사)씨는 40대를 앞둔 지난해 갑자기 '그동안 열심히 살았지만 해놓은 게 없구나'라는 회의감이 밀려왔다. 중년에 나타나는 우울증과 무기력감. 이른바 '사추기(思秋期)' 증상이었다. 그래서 이씨가 찾은 게 댄스스포츠다. 지난해 9월부터 매주 일요일 2시간씩 부인과 함께 차차차.삼바 등을 배웠다. 그는 "아내와 가까이 마주서서 정신적 교감을 나누다 보니 부부 사이도 좋아졌다"며 "인생의 황혼에도 아내와 함께 음악에 맞춰 춤추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

함께 춤을 배운 커플 중에는 60대 후반의 사업가, 50대 후반의 회사원 등 다양한 나이와 직업의 사람들이 섞여 있다.

◆ 홈피.채팅.번개모임도=온라인에서도 중년의 바람이 거세다. 인터넷엔 '중년의 사랑방' '중년의 쉼터' 등 중년을 위한 카페가 여러 개 운영 중이다. 대부분 1970년 이전 출생자로 가입을 제한한 이 카페들의 회원 수는 수천 명에 달한다. 회원들은 주로 게시판을 통해 '치매에 걸린 어머니'나 '외동딸의 결혼' 등 사는 얘기와 고민을 나눈다. 또 자신이 찍은 사진이나 자작시를 올리기도 한다.

'세이클럽'에서 홈피를 운영 중인 박모(56.회사원)씨는 동년배의 홈피를 둘러보고 온라인 채팅을 하느라 하루 2~3시간씩을 보낸다. "올리신 글을 보고 감명받았어요"라는 소감부터 "아들을 언제 군대에 보내야 할까요" 같은 일상사까지 쪽지로 주고 받으며 사귄 40, 50대 온라인 친구가 벌써 네댓 명이다. 그는 "서로의 홈피에 방명글을 남기고 쪽지를 통해 하소연할 곳 없는 속 얘기를 나누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말했다.

휴일엔 중년 카페의 회원들끼리 번개모임을 통해 만나 등산을 가기도 한다. 중년 회원 6만여 명이 활동 중인 '피플475' 사이트를 운영하는 이만동(50)씨는 "정신적.육체적으로 무너지기 쉬운 중년들에게 온라인이 위안의 장으로서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한애란 기자<aeyani@joongang.co.kr>
사진=강정현 기자 <cogito@joongang.co.kr>

'제1회 CEO 파티' 기획한 안시영씨
"턱시도.드레스 안 입어도 돼요"

"고령화 시대에 맞춰 중년들의 놀이문화도 변해야죠."'제1회 CEO를 위한 네트워킹 파티'를 기획한 하트뷰 에이전시의 안시영(50.여.사진) 대표는 스스로를 "국내 유일의 50대 파티 플래너"라고 소개했다. 미술학원 원장, 다이아몬드 딜러, 큐레이터 등 다채로운 경험을 해온 그가 파티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최근이다. 시대는 바뀌는데 중년의 놀이문화는 남성들의 질펀한 밤문화밖에 없다는 게 안타까웠다. 그러던 차에 서울 청담동을 중심으로 유행하는 파티문화가 눈에 띄었다고 한다. "20, 30대 유학파를 중심으로 서양의 파티문화가 활성화돼 있는 점에 착안해 40, 50대도 해볼 만하다 싶었어요. 제가 아예 파티 플래너로 나섰죠."

아직 중년들은 파티라고 하면 이브닝드레스나 턱시도를 입는 것으로 생각하고 어려워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이번 파티는 무대 위 공연이 주가 되고 중간중간 관객의 참여가 이뤄지는 형식으로 기획했다. 하지만 그가 가장 강조하는 놀이의 요건은 '참여'다. "얼마나 참여하는가에 따라 놀이의 기쁨이 달라져요. 가만히 서서 보고 있는 사람과, 함께 어울려 논 사람은 느낌이 천양지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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