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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영의 글로벌 인사이트] 2001년 중국 WTO 가입 후원한 미국, 제 발등 찍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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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1999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오른쪽)은 미국 워싱턴을 방문한 주룽지 중국 총리에게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지원을 약속했다. [사진 조지타운대]

1999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오른쪽)은 미국 워싱턴을 방문한 주룽지 중국 총리에게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지원을 약속했다. [사진 조지타운대]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면 우리 상품을 더 많이 수입하게 되는 것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가장 소중한 가치인 ‘경제적 자유’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중국, 낮은 관세 덕에 2위 경제 대국 #국유기업 지원, 지식재산 탈취 논란 #미국 “WTO 불공정” 중국 직접 공격 #자유 무역 파수꾼에서 ‘식물 기구’로

2000년 3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존스홉킨스대 국제관계대학원(SAIS) 연설에서 중국의 WTO 가입이 미국 국익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후원으로 이듬해 중국은 WTO에 가입했다.

“중국은 큰 경제 권력이지만 WTO에서는 개발도상국으로서 특혜를 누리고 있다. 이게 공평한가. WTO는 오랫동안 미국을 부당하게 대우했다.”

2018년 4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트위터에 올린 글이다. 중국과 WTO에 대한 선전 포고였다. 트럼프는 WTO를 탈퇴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면서 중국과는 무역전쟁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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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이 두 번 변하는 동안 WTO에 대한 미국의 태도는 완전히 바뀌었다. 클린턴(민주당)과 트럼프(공화당) 대통령의 소속 정당이 다르기 때문만은 아니다. 트럼프 당선으로 시기가 앞당겨지긴 했지만, WTO를 둘러싼 미·중 갈등은 언제든 일어날 일이었다는 게 전문가의 시각이다.

WTO는 자유무역 확대를 추구하는 규범이자 협상의 장이다. 규범 위반 회원국을 제소하고 구제받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과의 무역 분쟁을 WTO 안에서 해결하는 대신 직접 손보겠다고 나서자 WTO의 ‘무능’이 새삼 부각됐다.

한때 자유 무역의 파수꾼이었던 WTO는 어쩌다 ‘식물 기구’로 전락했을까. 미국은 왜 그때는 WTO가 맞고 지금은 틀리다고 하는 걸까.

◆중국에 손 내민 미국=2001년 중국의 WTO 가입은 미국의 적극적 지원 아래 이뤄졌다. 클린턴 행정부는 중국이 WTO에 가입해 시장 경제에 편입되면 미국과 세계 경제에 유리하다고 의회를 설득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개개인이 꿈을 실현하면 (정부에) 더 많은 요구를 하게 될 것이다. 인터넷 발전과 맞물려 중국은 미국처럼 변모할 것”이라고 연설했다.

WTO 가입 후 빠르게 성장한 중국 경제

WTO 가입 후 빠르게 성장한 중국 경제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워싱턴 정·관계 인사 대부분 이에 동의했지만 유독 적극적으로 반대 의견을 편 전문가가 있었다. 통상 전문 변호사 로버트 라이트하이저였다.

그는 당시 뉴욕타임스 기고에서 “중국이 WTO에 가입하면 지배적인 무역 국가로 떠오를 것이며, 미국 내 모든 제조업 일자리가 안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라이트하이저 변호사는 2017년 트럼프 행정부 통상 정책의 수장이 됐다. 그는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로서 올해 초 의회에 제출한 연례보고서에서 “중국이 WTO에 가입하도록 미국이 지원한 것은 실수였다. 그 후 중국은 시장 경제로부터 더 멀어지고 있다”고 썼다.

중국이 시장을 개방하지 않고 공정 경쟁에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WTO 기본 원칙을 위반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미국 기업의 지식재산권과 첨단 기술을 중국에 도둑맞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보고서에서 “중국을 바꾸기 위해 WTO와 별개의 독자적인 조치를 하겠다”며 전쟁을 예고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이 지난해 11월 중국 베이징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만났다. 8개월 뒤 미ㆍ중 무역전쟁이 시작됐다. [베이징 A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이 지난해 11월 중국 베이징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만났다. 8개월 뒤 미ㆍ중 무역전쟁이 시작됐다. [베이징 AP=연합뉴스]

◆호랑이가 된 중국=세계 2위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지만 1990년대만 해도 중국은 가난했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94년 중국 인구의 60%가 하루 1.9달러(약 2100원) 미만으로 생활하는 빈곤층이었다.

중국 내 개혁론자들은 경제 선진화 전략으로 WTO 가입을 추진했다. 저임금을 활용해 제조업을 키우고, 수출길을 열기 위해선 중국산 상품에 대한 관세를 낮춰야 했다. WTO 가입이 지름길이었다.

WTO는 수입품 상호 간 차별을 금지하고(최혜국대우) 국내 상품과 수입품 간 차별을 금지(내국인대우)한다. 평균 관세율은 내려가게 된다.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 체제가 출범한 1947년 22%였던 평균 관세율은 2000년 3%로 떨어진 뒤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거대 수출 시장을 얻는 대가로 중국은 무역 장벽을 낮추고 시장을 열기로 했다. 해외 투자가 중국으로 쏟아졌다. 2001년 470억 달러(약 53조원)였던 외국인 투자액은 10년 후 1240억 달러(약 139조원)로 뛰었다. 중국은 ‘세계의 공장’이 됐다.

미국의 대중 무역적자는 눈덩이처럼 커지고, 일자리는 줄었다. 데이비드 오토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팀 연구에 따르면 1999년부터 2011년까지 중국과의 경쟁에 밀려 사라진 미국 내 일자리가 240만 개에 달했다.

중국의 WTO 가입이 세계 경제에 기여한 바도 있다. 클린턴 행정부에서 USTR 대표를 역임한 샬린 바셰프스키는 WSJ과의 인터뷰에서 “중국이 세계 2위 수입국이 되면서 모든 국가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2009년 금융위기 때도 세계 경제가 더 가라앉는 걸 막아줬다”며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중국이 글로벌 경제에 기여한 정도가 크다”고 말했다.

◆갈등 해결 못 하는 WTO=중국은 과실을 얻었지만, 선진국의 기대만큼 시장은 열리지 않았다. 마크 우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는 언론 인터뷰에서 “중국 경제가 성장할수록 정치적 통제가 강해졌다”고 말했다.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시장 경제 국가 간 무역 분쟁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규모로 중국이 무역을 왜곡했다”고 전했다.

미국·유럽연합(EU)·일본 등 선진국은 중국 정부가 국유 기업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관치 경제, 중국에 투자하는 외국 기업이 중국 업체와 합작회사를 설립해야 하는 의무 조항 등을 대표적 불공정 사례로 꼽는다. 하지만 현행 WTO 체제는 이런 갈등을 해소하지 못한다.

국유 기업 또는 ‘공공 부문’의 기준과 범위가 모호해 어느 한쪽 손을 들어주기 어렵다. 중국 경제에서 국유 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2001년 이후 줄다가 최근 다시 늘고 있다. 니콜라스 라르디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 박사에 따르면 최근 중국 정부 투자액이 민간 투자보다 최고 세 배 많다.

첨단 기술 육성책인 ‘중국제조 2025’를 추진하면서 국유 기업에 대한 보조금 지급, 국영 은행을 통한 자금 조달이 늘어서다. 중국 정부는 “WTO 규정을 준수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박현영 글로벌경제팀장 hy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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