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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가는 자의 고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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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영국의 탐험가 어니스트 섀클턴 경은 위기 속의 지도자상을 가장 잘 보여준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1914년 8월 탐험선 인듀어런스호를 타고 남극 횡단에 나선 섀클턴과 27명의 대원은 배가 침몰하자 떠도는 얼음섬에 갇히고 말았다. 대원들은 추위와 굶주림 속에 생존을 위한 처절한 사투를 시작했다. 그러나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극지에서 언제 끝날지 모르는 장기간의 고립된 생활은 대원들의 몸과 마음을 갉아먹었고, 급기야 생환에 대한 희망마저 흐릿해졌다. 이때 섀클턴은 불굴의 의지로 분연히 일어나 대원들을 격려하는 한편 다섯 명의 대원을 이끌고 필사적인 구조요청에 나선다. 이들은 조그만 구명용 보트 하나로 1280㎞에 이르는 거칠고 험한 드레이크 해협을 건너고, 도끼 한 자루와 로프 한 다발에 의지해 해발 3000m의 얼음산을 넘어 끝내 구조대가 있는 사우스조지아 기지에 도달했다. 섀클턴은 조난당한 뒤 무려 634일 만에 단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전 대원을 구조해 돌아왔다. 그 과정에 그가 겪어야 했던 처절한 고독과 인간적인 고민은 필설로 다 형용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는 개인적인 고통과 번민을 가슴에 묻은 채 대원들에게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대원들은 그런 섀클턴을 전폭적으로 믿고 따랐다.

노무현 대통령은 요즘 지도자로서의 고독을 뼈저리게 느끼는 모양이다. 노 대통령은 4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민경제자문회의에 참석한 이용득 한국노총 위원장에게 "이 위원장이 적극적으로 대화에 참여하다 보니 비난과 고통을 받는다는 데 이것이 다 한발 앞서가는 사람의 고독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나도 시대에 앞서가다 손해를 본 적이 많다"고 했다.

국정운영의 최종 책임을 지고 날마다 나라의 장래가 걸린 수많은 결정을 내려야 하는 대통령은 외로울 것이다. 누구도 대통령직을 대신할 수 없고, 책임을 나눠질 수도 없기에 그 고독의 깊이는 헤아릴 길이 없다. 섀클턴과 같은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는 아니지만 지난 3년여 동안 말 많고 탈 많은 대한민국호를 이끌고 난파의 위험을 헤쳐오느라 지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노 대통령이 말하는 '앞서가는 자의 고독'은 섀클턴의 '처절한 고독'과는 달리 왠지 공허해 보인다. 우선 지도자가 고독의 속내를 자주 드러내 보이는 것 자체가 지도자답지 않다. 더군다나 고독의 실체가 넉넉한 관용과 묵직한 인내의 결과라기보다는 분파적인 독선과 얄팍한 자만의 기운이 엿보여 안타깝다. 스스로 '시대를 앞서가는 지도자'로 자리매김한 것도 그렇지만, 그 길을 택해 '손해를 봤다'는 인식은 공감하기 어렵다.

앞서간다고 생각하는 이의 고독도 견디기 힘들겠지만, 그래서 손해를 봤다는 지도자를 바라보는 국민도 힘겹다.

김종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