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응체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요즘 일본작가 「이노우에」(정상하)라는 사람이 쓴 글을 재미있게 읽은 일이 있다. 태평양전쟁말기 조일신문을 뒤적거리며 이 작가는 지면의 한 구석에서 이상한 기사들을 보았다.
동경의 어느 대회사는 월요일이면 사원들의 출근율이 보통 때의 절반으로 떨어진 다는 것이다. 기사는 여기서 그치고 그 이유는 독자들의 상상에 맡겼다.
일요일이면 회사원들은 하루종일 생활필수품들을 사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월요일엔 제시간에 출근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기진맥진해 진다는 사실을 암시한 것이다.
어느 특공대 기지를 방문한 기사도 있었다. 조일신문기자는 밑도 끝도 없이 한 소년병사가 꼬박 사흘 동안이나 연필만 깎고 앉아있는 얘기를 썼다. 이 역시 그 부대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그보다도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따로 있다. 일본의 그 혹독한 군국주의체제 아래서도 일본언론들은 무언가 은유와 암시로나마 국민들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했다는 사실이다. 한치의 양식이라도 있는 언론들은 면면을 채운 거짓 전승기록 아닌 일단 몇 행의 기사로 진실을 알리려고 했다.
해묵은 일본얘기가 아니라 우리 나라 신문들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이른바 권위주의 시대, 독재시대를 겪으며 그런 일들을 했었다. 독자들은 1면의 대문짝 만한 「관제」기사보다는 한 귀퉁이의 우표딱지 만한 기사에서 세상의 진실을 읽을 수 있었다.
요즘 80년도 언론통폐합의 진상이 한 꺼풀씩 밝혀지면서 그 동기가 언론의「저항체질」을 「순응체질」로 바꾸는데 있었다는 사실이 문서로 확인되고 있다.
권력자들은 그런 일들을 강행하고 나서 필경 『휴-』하고 긴 숨을 내쉬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신문들은 일단 몇 줄의 「큰 기사들」을 무슨 수를 써서든 냈으며 국민들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 훤히 알고 있었다.
때로는 어딘지 알 수 없는 밀실에 끌려가 거꾸로 매달려 개처럼 몽둥이질을 당한 언론인도 있었다. 손가락에 전기 줄이 감기고 콧구멍에 물을 부을 때 신음하면 그 옆에서 하얗게 웃으며 야유하는 인간모멸도 당했다.
언론의 「순응체질」은 인간의 머리에서 이성을 지워버리지 못하는 한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고문으로도, 통폐합으로도 되지 않았다. 저항체질은 언론의 생존본능이기도하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