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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도 코미디도 에누리와 덧칠을 덜어내는 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9면

자신이 직접 차린 기원에서 바둑돌을 놓아보고 있는 엄용수. 그는 바둑을 통해 만난 다양한 사람들이 개그맨 생활에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장진영 기자]

자신이 직접 차린 기원에서 바둑돌을 놓아보고 있는 엄용수. 그는 바둑을 통해 만난 다양한 사람들이 개그맨 생활에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장진영 기자]

개그맨 엄용수(65)는 모두가 알아주는 연예계 바둑 고수다. 한국기원 공인 아마 6단증의 보유자이며, 과거 EBS ‘바둑교실’과 스카이라이프 ‘오로확대경’ 등 바둑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애기가인 그가 지난달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에 기원을 열었다. 이름은 ‘사랑이 꽃피는 기원’. 그리고 요즘에는 최초의 연예인 바둑대회를 기획하고 준비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대회는 다음 달 28일 영등포구민회관에서 열린다. 엄용수를 24일 ‘사랑이 꽃피는 기원’에서 만나 그가 들려주는 바둑 인생 이야기를 들어봤다.

연예인 기전 여는 개그맨 엄용수 #공인 아마 6단, 서울에 기원도 차려 #프로기사 고교동창 덕분 실력 늘어 #“함께 어울리는 자리 위해 대회 개최 #바둑, 소통·교류 폭 넓히는 매개체”

연예인 바둑대회를 기획한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궁금하다.
“공식 명칭은 ‘제1회 한국방송예술인단체 바둑대회’다. 대회라고 이름 붙였지만, 이번 자리의 진짜 목적은 바둑을 잘 두는 사람을 뽑는 게 아니다. 바둑을 매개로 연예인 선후배가 화합하는 자리를 만들고 싶었다. 특히 나이 드신 선배 연예인들이 제대로 시간을 보내거나, 사람들과 어울릴 만한 자리가 많지 않다. 바둑뿐 아니라 오목·장기 등도 함께하면서 즐기는, 일종의 축제라고 보면 된다. 기원을 차린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연예인들의 놀이터를 만들고 싶어서였다.” 
특별히 바둑을 고른 이유가 있나.
“바둑은 소통이자 교류다. 바둑을 두다 보면 남녀노소 불문하고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바둑이야말로 만나는 사람의 폭을 자연스럽게 넓혀주는 진정한 매개체라고 할 수 있다. 나도 바둑을 두면서 인생에 도움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을 받았나.
“막연하게 개그맨을 꿈꾸던 시절, 기원에서 어떤 분을 만났다. 바둑을 두고 난 뒤 술을 한잔하게 됐는데, 그분이 나에게 ‘진정한 방송은 인간적인 것이다. 진정한 방송인이 되려면 휴머니스트가 돼야 한다’고 말씀해주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분이 MBC의 이사를 맡고 계시던 분이었다. 지금도 방송을 하면서 그분 말씀을 떠올릴 때가 있다. 그때 한마디는 내가 방송을 대하는 태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바둑은 어떻게 처음 접했나.
“중학교 때 우연히 일본 바둑책을 구했다. 일본어는 몰라도 번호가 있어서 기보를 보며 더듬더듬 공부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는 프로기사 이주용 6단(1994년 작고)을 알게 됐다. 당시 이 6단은 프로기사 지망생이자 나와 동급생이었는데, 그와 두세 점 깔고 바둑을 많이 뒀다. 자취방에서 그와 뒀던 수많은 바둑 덕분에 실력이 급격히 늘었다.”
코미디와 바둑은 전혀 다른 분야 같다. 비슷한 부분이 있나.
“코미디와 바둑은 닮은 점이 많다. 사람들은 보통 ‘코미디는 단순히 오버액션을 하고 과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진정한 코미디는 내가 살아온 인생은 가장 사실적으로 생생하게 전달할 때 완성된다. 웃기기 위해 양념을 치고 진실을 호도하면 울림이 있는 코미디가 되지 않는다. 바둑 역시 형세를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판단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은가. 덧칠이나 에누리를 최대한 덜어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점에서 바둑과 코미디는 닮은꼴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바둑 사랑이 대단한데, 다시 태어난다면 바둑과 코미디 중 무엇을 선택할 것 같나.
“가장 아쉽게 생각하는 게 바둑을 너무 늦게 시작했다는 것이다.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대여섯살에 바둑을 배우기 시작해 프로 입단까지 도전하고 싶다. 프로기사가 되고 나서 개그맨을 할 수 있다면 최고의 인생이 될 것 같다.”
한 수 배우고 싶은 프로기사는.
"이세돌 9단이다. 이 9단의 변화무쌍하고 호전적인 바둑스타일을 좋아한다. 나도 맹렬하게 싸우는 바둑을 즐겨 둔다. 이 9단에게 한 수 배우면서 그의 전투적인 바둑을 맛보고 싶다.”
바둑의 매력은 무엇인가.
“누군가를 만나 바둑을 둔다는 건 상대와 생각을 온전하게 교류하는 일이다. 나의 수읽기도 중요하지만, 바둑을 잘 두려면 상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수읽기 해야 한다. 그 과정을 통해 나와 전혀 다른 인격과 문화를 만나고 교류할 수 있는 게 바둑의 가장 큰 매력이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바둑은 온라인 대국보다 직접 만나서 두는 게 정수라고 생각한다.”

정아람 기자 a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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