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폐론 맞선 수세·농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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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추수가 한창인 곡창 호남의 농촌에는 예년에 볼 수 없었던 수세폐지와 농조 해체운동, 이에 맞선 존치 운동이 세차게 일고 있다.
특히 추수와 함께 수세 징수를 앞두고 꺼질 줄 모르는 이 양대 운동 바람은 세찬 격돌이 예상되며 전국적으로 확대될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실태>
『수세는 죽어도 못 낸다. 농조를 해체하라.』 지난해 하반기부터 전남의 최대곡창 나주와 해남·강진 등 지방에서 일기 시작, 도내로 확산됐고 양대 선거를 통해 선거공약으로 등장하는 등 처음부터 파란이 예고됐었다.
집단서명·대규모 시위농성 등 농민들의 실력행사는 정부여당의 수세인하조치 등 진정책에도 사그라들줄 모른 채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도내 14개 시·군 농민대표들로 구성된 수세 폐지 전남대책위원회(위원장 윤치영)를 결성, 오는 11월 금년도 분 수세고지서 발부를 앞두고 수세거부운동을 전국 농촌에 확산키로 하는 등 시간이 흐를수록 그 강도를 더해가고 있다.
대책위는 l7일 수세폐지와 농조 해체 및 수리청 신설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 『부당 수세 거부운동은 이제껏 빼앗긴 모든 권리에 대한 농민들의 주권선언이며 더 이상 빼앗길 것도 물러설 곳도 없는 농민생존권 투쟁의 배수진』이라며 『수세는 일제가 식민지 수탈정책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마땅히 철폐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남지방 농민들의 이 같은 운동은 곧바로 이웃 전북지역으로 확산, 지난해 순창지역에서도 조합비(수세) 납부 거부운동이 빚어졌고 조합비 징수시기를 앞두고 김제 등에서 농조 존폐논쟁이 거세게 일고 있다.

<원인>
농민들의 수세거부·농조해체운동의 빌미는 세금이나 마찬가지인 과중한 조합비, 그리고 농조의 비 민주적인 운영체제 때문.
조합비 명목으로 농민들에게 부과되는 수세는 저수지 등 각종 수리시설 이용료로 농조의 대종 수입원이다.
전남의 경우 논 10a당 평균 벼 25·4g씩 부과되는 수세는 농가에 큰 부담을 줄만큼 과중한데다 과태료에 강제징수까지 성행, 농민들에게 지겨운 세금으로 인식돼왔다.
농민들의 쌓인 불만이 때마침 터지기 시작한 것은 민주화 열풍 속에서 구체적인 행동표현으로 분출한 것이다.
아울러 농조에 대한 농민들의 불신도 마찬가지. 일제치하 「농민수탈의 상징」이었던 수리조합으로 출발한 농조는 해방 후 한때는 그런대로 농민들의 조합으로 자치운영 돼오다 6l년 조합원들로 구성된 평의회가 해체되면서 비민주적인 관치 조합의 길로 들어섰다.
특히 70년 농조법을 제정하면서 농촌근대화 촉진을 내세워 「잠정조치」 (농촌근대화촉진법 제 9, 10조 등) 라는 자물쇠로 묶어 사실상 농민의 농조운영 참여를 완전 배제시킨 것.
조합원, 즉 농민들의 권리인 ▲총회소집권 ▲임원의 선거권과 피선거권 ▲정관 등 변경 폐지와 사업계획수립, 조합비의 결정권 등이 모두 박탈됐다.
『농조는 농민조합이 아닌데 왜 농민이 낸 수세로 운영돼야 하느냐.』
전남 나주군 다시면 농민회장 김재국씨(35 는 『수세 폐지는 물론 그동안 거둬들인 수세도 돌려줘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농조 폐지를 주장하는 농민들은 『국비와 농민부담으로 설치한 수리시설을 농민이 사용하는데 그 사용료를 내야하는 것은 형평에도 어긋날 뿐 아니라 이중부담』이라고 반발하고 있으며 『관료출신의 조합장 임명제로는 농조의 주인인 농민 조합원을 기만하는 행위』라고 강력 비난하고 있다.

<존치 운동>
그러나 전북 등에선 이에 맞서는 존치 운동 또한 맹렬하다.
이미 「전국 농조 및 연합회 해체 거부투쟁위원회」가 결성돼 농조 경영개선 및 조합비 인하조건을 내걸고 농조 폐지의 부당성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존치 측의 주장은 『농조를 행정기관에 흡수시킬 경우 농조는 수계로 이뤄진 대신 행정은 구역으로 이뤄져 수계말단지역의 원활한 급수가 어려워 안전영농을 위협, 결국 농민들에게 손해를 끼친다』고 주장, 『조합장 직선·조합비 대폭인하 등으로 체계를 개선해야 한다』 고 맞서고 있다.
장영규 전남도 농지과장은 『대규모 댐 등 방대한 수리시설의 관리 측면을 고려할 때 농조 해체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라면서 『농조 기능의 행정기관 흡수는 자율화·자치화 시대조류에도 역행하는 것이며 해체 후 농조 직원들의 무더기 실직사태 등 사회적 부작용도 고려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농조 현황>
전남의 경우 15개 농조(조합원 16만2천6백 63명)가 있다.
올해 총예산은 2백 2억 원으로 이의 절반이 넘는 수세(1백 31억 원)로 운영되고 있으나 수세거부운동확산으로 수세 징수 실적이 저조, 감가적립금 등으로 회계적자를 메워 겨우 결산승인을 맡는 등 편법 운영을 하고 있는 실정.
87년도분 수세는 총 1백10억6천8백92만원이었으나 징수액은 77.4%인 85억6천5백66만1천 원. 전북은 전국 최대규모의 동진 농조 등 8개 농조(조합원 13만8천1백30명). 올해 총 조합비는 세입의 80%인 1백60억 2천8백만 원으로 조합원 당 평균조합비는 11만 6천 원.
여기에 올 세출총액은 2백1억3천3백만 원으로 이 가운데 인건비가 30%인 60억3천4백만 원, 경비 14%, 기타 10%, 예비비 3%등 57%가 조합운영에 따른 세출이며 43%인 86억4천8백만 원이 조합원을 위한 사업비다.

<대책>
상당수 농민들과 농조·관계당국 임직원 등은 농조의 혁신적인 운영관리체제개선이 시급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조합장의 직선제 등 농조의 민주화·농민조합만이 해결의 열쇠라고 보고 있다.
특히 농민들은 농촌실정을 감안, 수세 부담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파격적인 농정시책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아무튼 수세와 농조 문제는 조합비 징수시기를 앞두고 또 한차례 돌풍이 예상되고 있는 가운데 이번 정기국회에서도 농조 폐지와 존치를 둘러싼 정당간의 격돌이 예상돼 농조의 진로를 점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전남=임광희 기자 전북="모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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