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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언의 시시각각] 열정과 무능 사이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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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3호 34면

이상언 논설위원

이상언 논설위원

1793년 프랑스에서의 일이다. 1월에 루이 16세가 단두대에서 처형됐다. 혁명 본산인 국민공회를 로베스피에르·당통 등 급진파(자코뱅)가 장악했다. 4년 전 “빵을 달라”며 시작한 혁명이었는데, 시민들은 여전히 배고프다고 절규했다. 소요가 발생하기도 했다. 국민공회는 굶주림 해결을 위해 빵값을 낮추기로 했다. 3년 전 평균 빵 가격을 조사한 뒤 그 액수의 133%를 빵값 상한선으로 지정하는 법을 만들었다.

빵값 통제와 닮은 최저임금 사태 #선한 동기가 선한 결과 보장 못해

그러자 빵 장수들이 밀가룻값이 비싸서 그렇게는 빵을 공급할 수 없다고 아우성쳤다. 그 결과로 밀가룻값도 규제 대상에 올랐다. 밀가루 상인들은 곡물값이 문제라고 했다. 곡물 가격도 정부 통제 영역에 포함됐다. 돈벌이가 어렵게 된 제분소는 영업을 중단했다. 국민공회는 3개월 전에 미리 신고하지 않고 문을 닫는 제분소와 빵 가게 주인을 처벌하는 법을 만들었다. 죄목은 ‘반혁명죄’였다.

서민 고통을 덜어주겠다는 ‘착한 정책’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는데도 빵 공급은 여전히 원활치 않았다. 억지로 영업하는 빵 가게들은 생산량을 줄였고, 싸구려 재료를 사용했다. 빵 가게 앞에서 줄을 섰다가 허탕 치는 경우가 속출했다. “혁명 전보다 더 딱딱한 빵을 먹게 됐다”는 원성도 쌓였다. 급기야 툴루즈 등의 지역에서는 지방정부가 빵 공장을 만들었다. 하지만 ‘공영 빵 공장’도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생산·유통망이 허물어져 원재료 품귀 현상이 빚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보이는 주먹’이 ‘보이지 않는 손’에 완패했다.

국민공회는 다른 생필품에도 규제를 가했는데 결과는 빵 문제와 비슷했다. 이듬해 민심이반과 자중지란 끝에 급진 정치세력이 몰락했고, 한 해 뒤 나폴레옹 정권이 탄생했다. 훗날 카를 마르크스는 로베스피에르에 대해 “만사의 근원인 경제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정치의 힘에만 기댔다”고 평가했다. 한나 아렌트는 “자유를 지키기 위해 자유를 없애는 자가당착에 빠졌다”고 했다. 로베스피에르는 본디 ‘도덕적 정치인’의 표상이었다. 혁명의 중심이었지만 국민공회 공안위원회 위원 이상의 직함을 가진 적이 없다. 내부 반란으로 처형되기까지 파리의 월세방에서 살았다.

이쯤에서 우리 문제를 보자. 지난해 말 언론이 ‘7530의 역습’을 말했다.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이 일자리 감소의 부작용을 낳을 것이라고 걱정했다. 당시 청와대 참모진과 경제 관료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가격(임금)이 오르면 수요(일자리)가 준다는 기초적 경제 상식을 무시했다. 그랬던 이들이 며칠 전에는 자동차 수요를 늘리겠다며 세금을 깎아 차 가격을 내렸다.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다.

편의점 주인을 포함한 자영업자들의 비명을 엄살로 여기던 이들은 ‘집단행동 불사’ 사태에 당혹해 한다. 그러면서 건물주, 프랜차이즈 본사, 신용카드사로 화살을 돌린다. 편의점 본사가 프랑스 곡물상 신세가 됐다. 임대료, 프랜차이즈 불공정 계약, 카드 수수료가 정말 문제라면 최저임금 인상 전에 손을 봤어야 했다. 어쩌면 지금 정책 입안자 중 누군가는 ‘공영 편의점 본사’ 설립을 구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대개 규제의 끝은 직접 개입이다.

빵값 통제와 최저임금 인상은 서민을 위한 정책이었다. 그 선한 동기가 착한 결과를 낳지 못했다. 안타깝다.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 윌리엄 매카스킬은 『 Doing Good Better』라는 책에서 국제적 아프리카 지원 사업이 현실과 동떨어져 본래 의도를 달성하지 못하고 있음을 다양한 사례로 보여줬다. 그는 책 서문에 이렇게 썼다. ‘따듯한 가슴에 차가운 머리를 결합시켜야 한다. 다시 말해 이타적 행위에 데이터와 이성을 적용할 때라야 비로소 선한 의도가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이상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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