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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글로벌 큰손, 서울 와도 전주까진 안 들러 ‘국민연금 패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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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지난해 2월 이삿짐업체 직원이 전북 전주시의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현관에서 서울 구사옥에서 가져온 사무기기를 옮기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지난해 2월 이삿짐업체 직원이 전북 전주시의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현관에서 서울 구사옥에서 가져온 사무기기를 옮기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국민 노후자금 635조원을 굴리는 한국 국민연금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규모의 연기금이다. 자산 규모 1600조원에 달하는 일본 공적연금펀드(GPIF), 1100조원을 넘는 노르웨이 국부펀드(GPFG) 다음이다. 천문학적인 금액으로 시장에 큰 영향을 미치는 ‘코끼리’라는 점은 비슷하지만 한 가지 두드러진 차이점이 있다. 세계 10대 연기금 중 본부가 수도나 금융 중심지가 아닌 지역에 있는 건 한국의 국민연금, 네덜란드 의료인연금(PFZW)뿐이다. 한국을 뺀 대부분 국가는 금융권 가까운 곳에서 시장과 함께 호흡한다.

위기의 국민연금<상> 전주 리스크 #김성주 이사장, 지역구 의원 때 #지방 분권 내세워 전주 이전 주도 #세계 10대 연기금 대부분 수도에 본부 #“정보·인맥 소외, 서울사무소 개설을”

일본 GPIF 본부는 도쿄의 지요다구에 있다. 노르웨이 GPFG도 수도 오슬로에 운용 조직이 있다. 미국·중국·싱가포르의 연기금도 마찬가지다. 캐나다 연금투자위원회(CPPIB)는 금융가가 밀집한 토론토, 유럽에서 두 번째로 큰 연기금인 네덜란드 공적연금(ABP)을 운용하는 APG는 암스테르담·헤렌에 자리 잡았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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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금운용본부 출신의 운용직 A씨는 “네덜란드 공적연금은 수도 암스테르담에서 주변 도시로 조직을 옮겼다가 수익률이 안 나오니까 운용 인력이 다시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네덜란드 PFZW는 인구 6만 명의 소도시 제이스트에 운용사 본부를 뒀다. 하지만 암스테르담에서 차로 40~50분이면 갈 수 있어 가까운 편이다. 서울에서 KTX를 1시간30분 타야 하고, 내린 뒤에도 차로 20분 넘게 이동하는 국민연금과는 차이가 있다. 사실상 주요 연기금 중 국민연금만 시장과 멀어진 것이다.

서울 여의도 금융가. 세계 10대 연기금 중 국민연금만 시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것으로 나타났다. [중앙포토]

서울 여의도 금융가. 세계 10대 연기금 중 국민연금만 시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것으로 나타났다. [중앙포토]

본부 위치는 해외에서 오는 금융계 ‘큰손’에게 직접적 영향을 미친다. 중앙일보가 최근 2년 내 기금운용본부를 그만둔 운용직 5명과 인터뷰했더니 이들은 한목소리로 전주 이전에 따른 ‘패싱’ 문제를 지적했다.

본부에서 근무한 운용직 B씨는 “투자 때문에 국내로 들어오는 해외 인사들이 많은데 전주까지 이동해야 하는 건 비상식적”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퇴직 운용직 C씨는 “외국 관계자들은 최소 반나절 걸리는 기금운용본부 방문을 건너뛰어 버린다”고 꼬집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실제로 몇 년 전만 해도 금융계 거물들이 앞다퉈 기금운용본부를 찾았지만 지금은 이름값이 떨어지는 기관에서만 본부를 방문한다. 기금운용본부 관계자는 “올 들어 금융계 큰손이 아무도 전주를 찾지 않았다”고 말했다. 전광우 전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은 “예전에는 해외 손님이 너무 많아서 사무실을 추가로 둬야 할 정도였다.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금융계 리더, CEO와의 접촉이 매우 많았다”면서 “원래는 이들이 대통령 못지않게 국민연금공단 이사장 등을 만나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국민연금 패싱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고 지적했다.

운용직들이 국내 시장 트렌드와 멀어지는 부작용도 가시화되고 있다. 전 본부 운용직 D씨는 “주중 전주에서 일하다 주말에 서울로 올라오면 가족들 보기 바쁘다. 시장 플레이어들과 시간을 갖거나 정보를 공유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A씨는 “공무원이라면 지방으로 이전해도 가족과 같이 가면 된다. 하지만 운용직은 2~3년 단위의 계약직이라 마음대로 옮기지 못한다”면서 “전주로 가면서 인적 네트워크 유지나 자기계발에 굉장히 불리한 여건이 됐다”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내부 인력의 이탈은 연차와 직급을 가리지 않는다. 특히 핵심 보직자들의 이직이 급증했다. 실장급인 수석 운용직 퇴직은 2013~2015년 1명에 그쳤다. 하지만 전주 이전을 전후한 2016~2018년에는 8명으로 뛰었다. 가장 낮은 전임 운용직의 퇴직이 같은 기간 14명에서 23명으로 늘어난 것과 비교하면 증가 폭이 훨씬 크다.

전북 전주시의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건물. [중앙포토]

전북 전주시의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건물. [중앙포토]

기금운용본부 전주 이전은 전격적이었다. 김성주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이 19대 의원 시절 지방 분권 등을 내세워 전주 이전을 이끌었다. 전주 이전을 담은 국민연금법 개정안이 2013년 6월 통과됐다. 당시 여당인 새누리당도 호남표를 의식해 법률에 찬성했다.

그 후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에서 기금운용본부 공사화와 서울 사무소 설치 등을 담은 법안을 발의하자 민주당이 벌떼같이 공격했다. 김 이사장은 20대 총선(전주 병)에서 정동영 의원과 맞붙었을 때 자신을 ‘미스터 기금운용본부’로 내세우며 전주 이전을 공적으로 내세웠다. 다른 전주 지역 의원들도 ‘서울사무소 존치를 좌시하지 않겠다’는 등의 입장을 수차례 피력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전주 리스크’가 이어지면 기금운용본부의 경쟁력이 흔들릴 거란 우려가 쏟아진다. 본부 퇴직 운용직 C씨는 “국민 자금을 열심히 굴리자는 의무감만으로 버티기엔 환경이 너무 안 좋다. 좋은 인적 자원이 없어진다는 건 서서히 연금이 안 좋은 길로 가고 있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국민연금법을 개정해 서울사무소 개설이나 서울 재이전 등을 검토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본부 이전이 정 어려우면 운용직 처우를 파격적으로 개선하자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기금운용본부를 퇴직한 운용직 D씨는 “기금운용본부 분소 설치도 정치권에서 안 된다고 반대하는데 옳은 길로 가는 것인지 의문이다. 기금 운용 조직만이라도 서울로 올라와야 한다”고 말했다.

B씨는 “본부 직원들의 이탈을 막기 위해선 처우를 대폭 개선해야 한다”면서 “본부를 전주에 그대로 둔다면 아예 본부 공사화와 함께 연봉을 지금의 2배까지 늘려줄 필요가 있다. 그러면 내부 분위기가 안정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정종훈 기자 sakeh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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