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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미워도 다시 한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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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서울대 교수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서울대 교수

50년 전 관객 37만 명을 동원한 공전의 히트작 ‘미워도 다시 한번’. 요즘 셈법으로 따지면 수백만 명을 훨씬 넘는 선남선녀가 청순가련한 여인의 사랑 드라마에 눈물을 훌쩍거렸다. 성공한 사업가 신호(신영균)의 아이를 낳은 혜영(문희)의 행복한 인생은 신호의 처(전계현)의 출현으로 산산조각이 난다. 아이와 작별하고 길을 떠나는 혜영의 비련은 남진의 구슬픈 노랫가락에 실려 눈물샘을 자극한다. ‘순애와 희생의 시가(詩歌)’라는 조금 생뚱맞은 카피가 달렸던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은 ‘다시 사랑해주오(Love Me Once Again)’.

정말 미운데, 미워 죽겠는데 #대한항공·아시아나 무릎 꿇고 #자성록과 혁신안 제출한다면 #다시 한번 돌아볼 아량은 있다 #직원 양심과 시민 감시 발동하고 #경영 거버넌스 바꾸는 것 중요해

다시 사랑해주오? 누가 누구를? 여배우 문희(文姬)라면 토 달 필요도 없지만 ‘우리의 날개 대한항공’은 아니다. 밉다. 미워 죽을 것 같다. 외국 낯선 공항에서 귀국의 설렘을 선물했던 우리의 날개는 이제 미움과 분노의 상징이 됐다. 1남2녀의 단란한 오너 가족이 어쩌면 저리도 다채로운 갑질을 해댔는지 연구 대상이다. 이미 고전이 된 조현아의 ‘땅콩 갑질’만 해도 기가 차는데, 남동생 조원태는 일찍이 ‘욕설 갑질’의 진수를 보였고, 이에 질세라 동생 조현민은 ‘물벼락 갑질’, 모친은 희귀한 유형의 ‘히스테리 갑질’을 연출했다. 조양호 회장은 ‘갑질 가족’의 가장답게 범죄 5종 세트로 수사를 받았다. 횡령, 배임, 사기, 약사법과 국제조세법 위반. 온 가족이 검찰에 출두한 횟수만도 열 번이 넘는다. 대한항공은 ‘갑질 가족의 날개’다.

그래도 선택지는 남았다고 안도하는 순간, 이건 웬 날벼락인가? ‘우리의 색동날개’ 아시아나는 기내식을 싣지 않고 먼 길을 비행했다. 단순한 배달 사고가 아니었다. 투자유치를 위해 기내식 공급업체를 제멋대로 바꾼 ‘갑질 경영’이 강요한 달갑지 않은 단식(斷食) 체험이었다. 그것도 억울한데, 정비사의 폭로는 충격적, 부품 돌려막기를 했단다. 비행기가 바다에 처박히지 않은 건 천만다행, 삼신 할매가 승객들을 보살폈다고 믿는 수밖에.

왜들 이러시나? 장거리 하늘길의 게이트키퍼는 딱 둘뿐인데, 대체 어쩌란 말인가? 갑질 가족의 주머니를 채워주기도 싫고, 어느 상공에서 엔진이 꺼질지 모르는 땜질 비행기를 타기도 겁난다. 몇 달 전 ‘재벌 군기 잡느라 좀 늦었다’고 너스레를 떤 공정거래위원장의 사고(思考) 구조에 혀를 끌끌 찼던 사람들조차 마음을 돌릴 만한 비상사태다. 제발 군기 좀 잡아 달라. 내부를 샅샅이 뒤져 갑질 경영을 근절할 근본 대책을 세워 달라. 해외 여행객 2500만 명 시대, 애국심이 투철한 국민 고객들은 우리의 날개에 비싼 여비를 기꺼이 지불해 왔는데 밀수와 탈세는 뭐고, 허기 비행과 공포 비행은 또 무엇인가?

송호근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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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항공사가 갑질 부실경영에 시달렸다면 직원들의 사기 저하는 물론 이미 ‘도덕적 해이’가 근무태도를 갉아먹었을지 모른다. 기강과 도덕의 해이는 사고 유발의 가장 위험한 세균이다.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때 승객 안전보다 오너의 신경질과 보복이 먼저 떠오른다면 어떻게 될까? 영화 ‘허드슨강의 기적’은 파일럿의 노련한 직감으로 155명의 생명을 구한 실화다. 회항 명령을 거부하고 허드슨강에 불시착한 이유를 따져 묻는 청문회에서 톰 행크스는 떳떳하게 말한다. 시뮬레이션에서 ‘인간적 요소’가 빠졌다고 말이다. 인간적 요소란 경륜과 기지로 승객의 생명을 책임지는 프로페셔널 스피리트. 결단의 35초! 거기엔 갑질 경영의 얼굴은 없었다.

제발 기우이길 바란다. 그런데 내부 인터넷망 익명 제보란에 독단 경영의 사례가 폭주하고, 급기야 광화문에서 규탄집회를 마다치 않는 것을 보면 그간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음을 짐작게 한다. 이 기회에 불법과 비리를 낱낱이 고발하고 마음속에 뭉친 응어리를 풀어헤쳐 하늘길의 안전을 확립해주기를 바란다.

그럼에도 한 가지 유념할 필요는 있다. 외국 국적 조현민을 대표이사로 등기해 항공법을 어긴 진에어를 그렇다고 면허취소로 단죄하는 것은 너무 나간 조치일 수 있다. 면허취소는 재산권 박탈에 해당한다. 자유민주주의에서 재산권은 천인가공할 불법 축재가 아닌 다음에야 보호받아야 한다. 항공법 위반에 준엄한 법적 징벌을 가하면 족하다. 진에어 직원 1700명과 그의 가족들에겐 죄가 없다. 오너 일가의 비상식적 행위와 범죄를 전 직원에게 묻는 꼴이 된다.

그래서 ‘미워도 다시 한번’이다. 정말 미운데, 미워 죽겠는데, 두 항공사가 자성록과 내부 혁신안을 무릎 꿇고 제출한다면 다시 한번 돌아볼 아량은 있다. 사랑해주오? 뭐 다시 사랑할 건더기라도 만들어야 마음을 돌릴 것 아닌가. 진정한 기업시민이 되는 길은 아프고 멀다. 직원의 양심과 시민 감시를 발동하는 일은 물론, 이참에 경영 거버넌스를 바꾸는 것도 중요하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서울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