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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진보지식인 성명에 현장은 없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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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서울대 교수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서울대 교수

속대발광욕대규(束帶發狂慾大叫), 폭염에 대님 매고 앉으니 미쳐 소리치고 싶다. 정권 교체 1년, 진보지식인 323명이 오랜만에 야심 찬 목소리를 냈다(이하 ‘성명’). ‘사회경제 개혁의 포기를 우려한다!’ 더 밀어붙이라는 서생(書生)들의 합창. 폭염도 참기 힘든데 진보의 책문(策文)은 발광욕대규다. 현장 감각 제로 건백서다.

‘최저임금 인상’ ‘주 52시간’ 폭탄 #온갖 대책으로 달랜들 뭣하나 #중상위 근로자들 임금 자제하고 #지원금은 개별 지급하는 게 답 #책상물림 지식인들 읊조림 대신 #제발 현장에 나가 보라!

불과 2년 전, 조선업에 18조원을 투입했을 때 진보지식인들은 말을 아꼈다. 무려 4만 명에 이르는 협력업체 직원이 쫓겨나 낙향할 때도 수수방관했다. 고연봉 노동자가 상습 파업을 해도, 민주노총이 그 강력한 단체행동권을 발동해도 누구 하나 말리지 않았다. 진보 ‘성명’에 당차게 동참한 서생들에게 진정 묻고 싶다. 대공장에 가봤냐고, 중소업체 직원들이 파산만은 면하려고 안간힘 쓰는 현장을 가봤냐고? 본사의 갑질과 급상승한 최저임금에 협공당하는 영세점주의 고충을 들어봤냐고 말이다.

그대들이 애지중지하는 ‘세 바퀴 경제’-소득 주도 성장, 혁신성장, 공정경제-는 누구나 원하는 바다. 그런데 그게 ‘성명’에서 열거한 그 입바른 대안들로 실현된다면 얼마나 좋으랴. 재벌 개혁,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부동산 보유세 강화, 복지증세, 관료 개혁! 다 맞지만, 부작용이 정책 목표를 갉아먹는 현실을 무시한 고루한 선비들의 경연(經筵) 답안이다.

재벌 개혁? 총수 일가의 사익 편취 근절과 거버넌스 개조는 환영할 일인데, 온갖 규제로 목을 옥죄면 미래 대응적 투자가 가능할까? 삼성 평택공장 짓는 데 수백 가지 규제를 돌파했다 하고, 동업종 다른 글로벌 기업은 공장 신축에 환경부·산업자원부·국회를 설득하고 시민단체·주민 의견을 수렴하느라 1년이 넘도록 뛰고 있다. 성장동력이 될 만한 산업이라면 규제 벌떼가 달라붙는데, 누가 먹거리 생산에 목숨을 바칠까? 20대 국회가 발의한 규제 법안은 무려 800건, 이 대열에 동참하지 못한 의원은 공천 탈락이다.

문 정권 1년, 공공부문에서 13만2000여 명이 정규직 신분을 받았다. 목표의 76%다. 그런데 공기관은 더 이상 정규직을 뽑지 않는다. 석·박사 전문직도 비정규직, 기간제로 일해야 한다. 정규직 티오가 찼다. 부동산 보유세 강화? 이론은 맞지만 상승하는 임대료를 막을 수 없다. 복지증세가 만능키인가? 우선 절반에 달하는 면세 근로자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 먼저다. 세금 거두고 더 돌려주면 된다. 복지증세를 말하려면 ‘전제조건’을 이수해야 한다. 중상위 임금생활자의 ‘임금 인상 자제!’. 누차 강조했지만 ‘복지=일자리 창출’이라는 유럽 복지국가의 기본 방정식은 임금양보로 작동한다. 양보분(分)만큼 고용이 늘고 복지가 투여된다. 한국에서는 ‘복지=의당 받을 권리’다. 인상된 임금과 복지비용을 기업주가 떠안으면 어떻게 고용을 늘릴 엄두를 낼까? 공기업과 대기업부터 임금 동결에 나서 보라.

진보 서생들은 그럴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한국의 세율이 적다고. 더 내야 한다고. 임금 양보하고, 복지 투입해 주고, 노동자가 생산에 올인 하고, 준조세가 없으면 왜 증세에 저항하겠나? 일일 기업주, 일일 노동자 체험이라도 해 봐라. ‘성명’은 이렇게 꾸짖는다. ‘최저임금 산입 범위를 확대함으로써 실제 효과는 반감되었다’. 숙식 제공하고, 학비와 병원비 대고, 명절 보너스 주는 나라가 OECD 국가에 있는가? 임금 구성 요소가 한국처럼 복잡한 나라도 없다. 영세점주가 가장 기피하는 ‘주휴수당’, 이것을 정부가 대주면 ‘메뚜기 알바’도 없어진다.

말이 나왔으니, 최저임금 보조금을 근로자에게 ‘직접’ 지불하면 많은 문제가 해결된다. 기업주는 시장임금으로 고용하되, 고용사무소가 최저임금 미달분을 개별 근로자에게 지급하면 당장 고용대란을 막을 수 있다. 기업주에게 최저임금 인상에 적응할 시간을 줘야 한다.

진보지식인들이 ‘공정경제’와 ‘소득 주도 성장’을 읊조리는 무대 뒤에서 을(乙)과 병(丙)의 대리전쟁이 치열하다. 메뚜기 알바 청년, 투잡 중년, 영세 점주들이 한결같이 말한다. 표 찍어줬는데, ‘왜 나한테 이래요? 왜 나만 갖고 이러시는 거예요?’

정부가 투하한 ‘최저임금 인상’ ‘주 52시간’ 폭탄은 정확히 기업주의 지불능력에 명중했다. 그런 후에 이름도 화려한 각종 대책으로 달랜들 뭣하나. 중상위 임금생활자의 임금 자제! 그리고 지원금을 하위 소득자에게 개별 지급하는 것이 답이다. 이것이 사민주의 복지국가의 집단지성인데, 우리의 노사정협의체는 임금 양보를 의제에 올린 적이 없다. 최저임금 인상에 전원 찬성한 공익위원은 틀림없이 외계인이다. 그대들이 이런 사민주의 방정식을 아는가? 정말 미쳐버리기 전에 외치고 싶다. 제발 현장에 가 봐라!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서울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