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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과 문화

'영상'이라는 단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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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내가 선생으로 있는 학교의 이름은 영상원이다. 기본적으로는 영화학교이지만 영화 이외의 다른 영상도 교육한다는 뜻에서 영화가 아니라 영상이라는 단어가 선택됐다. 이 학교에서 10년 동안 가르치면서 나는 '영상'이라는 단어에 대해 속으로 질문할 때가 많다.

영상이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널리 쓰이는 말이다. 영상기술.영상산업.영상자료.영상언어.영상매체.영상미학.영상문화.영상시대.영상학.영상학과 등 근래에 들어와 특히 자주 쓰이는 유행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 의미가 명확하게 규정돼 있는 것은 아니다. 보통 동화상 즉, 움직이는 이미지를 말하며 따라서 영화와 동의어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영화만이 아니라 텔레비전.비디오, 그리고 동화상이 아닌 사진을 포함해 기타 뉴미디어 화상(畵像) 전반을 가리키며 때로는 서구어 이미지(image)의 번역어로 아주 넓은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동아새국어사전에선 이렇게 설명한다.

영상(映像) : 1. 광선의 굴절이나 반사에 따라 비추어지는 물체의 모습. 2.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물의 모습. 이미지. 심상(心像). 3. 영화나 텔레비전의 화상(畵像).

인터넷엔 영화나 텔레비전의 화상을 가리키며 텔레비전이 보급된 이후 널리 사용됐다고 나와 있다. 그 이전에는 주로 영상(影像)이 사용됐는데 이 말에는 영상(映像)의 경우처럼 이른바 영상미디어라는 개념은 포함돼 있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알기로는 이 비출 영(映)자와 형상 상(像)자가 조합된 이 한자 단어는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 뜻이 명확하게 규정돼 있지 않아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른 의미로 임의적으로 사용돼 혼란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그 단어가 쓰이는 맥락에 따라 그 뜻이 정해지는 것이지만 일반적으로 한 단어가 한 범주에 속하는 사상(事象)을 대표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범주 설정의 이유나 타당성을 때때로 검토해야 할 필요가 생긴다.

여기서 비춘다는 한자어 의미가 특히 중요하다. 말하자면 근대적 광학기술에 의해 만들어져 스크린이나 브라운관 등에 비추어진 이미지 즉, 화상(畵像)을 가리키는 뜻이다. 사진 이미지는 렌즈를 통한 빛으로 맺혀지는 물체의 상(像)을 화학적으로 정착시킨 것이므로 당연히 영상에 포함되며 영화.텔레비전.비디오 이미지는 기본적으로 사진 이미지를 바탕으로 한 것이므로 영상의 범위를 대략 사진 발명 이후(post), 사진을 바탕으로 하는 이미지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면 대체로 무난할 것 같다. 이런 기준에서 보면 동영상이 아닌 그림이나 만화 또는 그래픽 이미지들은 영상에 포함시키는 것은 무리인 듯하고, 반면 광학적 조작에 의해 움직임의 환영을 만들어 내는 애니메이션, 컴퓨터 합성 동화상, 홀로그램, 레이저광(光) 이미지, 가상현실 이미지(VR) 등은 영상의 범주에 포함된다.

이 점에서 온갖 그림이나 형상 전반을 포함해 기억이나 상상 속의 정신적 이미지 즉, 심상(心象)까지 뜻하는 보다 넓은 의미의 영어.불어 단어인 이미지 또는 이마주와는 분명하게 구별된다. 말하자면 '영상'은 일본과 한국에서만 쓰이는 특수한 단어로 이에 해당하는 서구어는 없다. 나는 이 단어가 매우 쓸모가 있으며 이 단어에 의한 범주 설정이 매우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영상이라는 단어가 그토록 널리, 자주 쓰이는 것은 이 단어가 매우 유용하다는 증거다. 그러나 동시에 이 단어를 서구어의 이미지(image)나 픽처(picture)와 동일하게 사용할 경우 개념상 혼란이 일어나 그 쓸모가 떨어지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물론 한 단어의 의미는 구체적 맥락에서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린 것이지만 오용과 남용의 폐해가 언제나 뒤따른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최 민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