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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재 울리는 청춘의 랩 … 힙합은 이 시대 광대소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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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어려서 팝송 마니아였다는 이준익 감독. 그는 ’청춘이 아재를 설득하는 것보다 아재가 청춘을 이해하는 게 더 빠르다“고 말했다. [사진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어려서 팝송 마니아였다는 이준익 감독. 그는 ’청춘이 아재를 설득하는 것보다 아재가 청춘을 이해하는 게 더 빠르다“고 말했다. [사진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제목이 ‘변산’이라 다들 사극인줄 알아. 근데 주인공이 래퍼? 예측이 안 되지!”

영화 ‘변산’ 이준익 감독 인터뷰 #고향 시골에 내려간 무명 래퍼 #지질한 아버지 세대에 눈뜨다 #‘동주’‘박열’ 잇는 젊음의 희비극 #주연 박정민이 랩 가사 직접 써

이준익(59) 감독의 말대로다. 4일 개봉하는 그의 새 영화 ‘변산’은 제목이 풍기는 인상과 달리 ‘라디오스타’(2006)와 ‘즐거운 인생’(2007)을 잇는 음악영화다. TV의 힙합 오디션 프로그램 ‘쇼미더머니’에 6번 탈락한 서른두 살 무명 래퍼 학수(박정민 분)가 오래 연락이 끊겼던 아버지(장항선 분)가 위독하단 소식에 전북 부안의 고향 마을 변산에 가서 겪는 일을 유쾌하고 뭉클하게 펼쳐낸다. 학창시절 짝사랑의 흑역사, 아버지에 대한 원망 등 학수의 온갖 감정이 혼잣말처럼 읊조리는 랩에 담긴다. 시골 풍광에 랩을 녹여낸 청춘 영화라니, 환갑 앞둔 감독으로선 과감한 시도다. 이준익 감독은 “전작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가느냐가 감독이 가야 할 지향점”이라고 했다.

4년여 전 한 번 거절했던 시나리오라고.
“시나리오가 너무 올드했다. 심지어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은 내가 ‘사도’(2015)에서 찐하게 했는데 또 해? 그런데 주위에서 좋은 얘기라고 재차 권하기에 일단 각색을 하게 됐다. 애초 학수가 단역배우였는데 ‘럭키’(2016, 감독 이계벽)랑 겹치더라. 변두리 중의 변두리(‘변산’은 변두리 변[邊]자를 쓴다)와 대비를 이루는 게 뭘까. 지금 젊은이들의 가장 핫한 무대 ‘쇼미더머니’, 힙합 아닐까. 그러면서 래퍼로 바꿨다.”
랩에 어떻게 관심을 갖게 됐나.
“어려선 팝송 마니아였다(그는 어려서 경북 경주 한학자인 할아버지를 따라 새벽같이 일어나 붓글씨를 쓰다가도 팝송을 외곤 했다고 한다). 그때가 록이었다면, 지금은 랩인 거지. 예전에 록은 거의 사회파 가사였다. 요즘 랩은 개인화된 외침이다. 우리네 청춘들이 랩을 좋아하는 건 미국 힙합 흉내가 아니라 이 땅의, 자기의 삶을 솔직하게 고백할 수 있는 장이어서다. 록이 때론 정박, 때론 엇박으로 심장박동을 좇는다면 랩은 좀 더 가파른, 실핏줄의 맥박처럼 뛴다.”
‘변산’에는 도끼, 더콰이엇 등 실제 래퍼들도 등장한다.

‘변산’에는 도끼, 더콰이엇 등 실제 래퍼들도 등장한다.

그는 “따지고 보면 ‘왕의 남자’(2005)에서 광대 장생(감우성 분)이 줄 위에서 뱉어내는 프리스타일 사설이 조선판 랩”이라며 “조선 광대의 소리가 수백 년간 우리 삶에 공유돼오다가 미국에서 온 랩과 만났다”고 했다. 극 중 학수의 랩 가사는 학수를 연기한 배우 박정민이 직접 썼다.

박정민을 노래방에서 재발견했다고.
“노래는 못하는데 랩을 겁나 잘한다. ‘동주’(2016)의 독립운동가 송몽규 역을 할 때 봤던 잠재력도 어마어마했다. 쇳덩이같이 단단한 배우다. 박정민이 없었으면 이 영화 엎어야 했을 거다.”
랩을 걷어내면 기성세대의 충고처럼 느껴지는 대사도 많다.‘난 아재다. 그동안 아재스러움이 미움받기도 했지만 그걸 귀엽게 전환할 시기’라고 연출의도를 설명했는데.
“세대 차이를 강조하기보다 접점을 넓혀가는 게 공동체의 선이라 본다. 청춘을 겪지 않은 아재 없고 아재가 되지 않는 청춘 없잖나. 청춘이 아재를 설득하는 것보다 아재가 청춘을 이해하는 게 더 빠르다. 청춘을 거쳐봤으니까. 사실 ‘변산’은 아재들이 더 좋아할 영화다. 그런데 주인공은 학수니까 학수의 시선으로 자기 세대인 아버지를 바라보게 된다. 이 아버지가 얼마나 지질해. 마찬가지로 젊은 세대도 입장을 바꿔 보면 이해할 수 있는 게 많아진다. 적어도 다른 사람 때문에 내 인생을 일그러뜨리지 않을 균형 감각이 생긴다.”
어찌 보면 젊은 세대의 얘길 안 듣고 가르치려고만 했던 기성세대의 태도를 바꾸려는, 자기반성적인 영화인 셈이다.
“결과적으로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동주’와 ‘박열’을 잇는)‘청춘 영화 3부작’이란 건 마케팅을 위한 프레임일 뿐이다. 사실 청춘이란 틀을 짜는 것도 굉장히 폭력적일 수 있다. 아재는 왜 아재에 가두나. 그걸 열어놓고 서로 잘 ‘들어야’ 이해의 폭도 커진다.”
잘 들으면 뭐가 달라지나.
“감독으로서 지금 내 에너지, 크리에이티브는 다 들어서 얻은 거다. 한번 사는 인생 바뀌는 것도 아니고, 영화를 열네 편 찍었는데 타고난 재능은 바닥나도 옛날에 났다.”
주인공인 무명 래퍼 학수(박정민 분).

주인공인 무명 래퍼 학수(박정민 분).

주인공 학수를 비롯, 외면해온 스스로의 모습을 마주하게 만드는 영화다.
“자신의 과거가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난 아직도 도망가는 중이다. 돌아보면 여전히 불편하고 해결하지 못한 게 너무 많다. 그걸 현실에서 해결하기엔 난 너무 비겁해. 용기가 없어. 그래서 영화 속 판타지로 유사감정을 해결하는 거다. 영화가 나한텐 피안이다.”
사극에 뮤지컬을 접목한 ‘황산벌’(2003) ‘평양성’(2011) 등 독특한 시도를 해왔는데.
“영화가 좀 자유분방했으면 좋겠다는 열망이 항상 있다. 근데 너무 자유분방하면 망한다.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다. 인도영화는 뜬금없이 춤추고 노래하는데 12억 명이 좋아하잖나. 안전하게 아무것도 안 하면 욕도 안 듣겠지. 그래도 끊임없이 시도해야 새로운 문이 열린다. 그게 창작자의 의무다.”
영화를 계속해서 만드는 동력이라면.
“난 굉장히 성실한 사람이다. 그리고 영화현장에 친구가 많다. ‘변산’의 박정민과 김고은, 수많은 스태프가 다 친구다. 나이 차이 나 봤자 100살이다. 영화 속에선 1000년도 오간다. 1300년 전 황산벌에서 활약한 김유신, 김춘추 다 내 친구다. 시나리오를 쓸 땐 그 시대에서 나한테 말을 거니까.”
예측불허의 매력이 있다.
“두서없는 인간이다, 내가. 평생 임기응변으로 살았다. 정체될 곳이 없으니 정체되지 않은 거지. 그래서 자꾸 이상한 영화를 하고. ‘동주’하고 이 영화하고 누가 같은 감독이라 하겠나(웃음).”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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