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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최상연의 시시각각

40대 기수론 먹히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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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최상연
최상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최상연 논설위원

최상연 논설위원

어째서인지 인재는 어느 시기에 한쪽에서만 집중적으로 배출된다고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십자군 이야기』에서 적었다. 시간이 좀 지나면 이번엔 다른 쪽에서 인재가 집중적으로 배출된다는 것이다. 1차 십자군을 성공시킨 영웅들이 퇴장하자 주인공으로 등장한 이슬람 영주들을 묘사하면서였다. 왜 양쪽 모두 같은 시기에 인재가 나타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엔 뚜렷한 답이 없다. 인간은 인간의 한계를 알아야 한다는 신들의 배려, 혹은 ‘역사의 부조리’인지 모르겠다고 얼버무렸다.

공천권 없고 한시적 40대 비대위원장 #당 쇄신 핵심인 인적 청산 할 수 있을까

어쨌든 지금 우리 정치판이 딱 그 모습이다. 야권 몰락은 인재난이 으뜸 원인이다. 진보 쪽에선 전투력 있는 선수가 국회에 총집결한 유기적 구조다. 하지만 야당은 몇 차례의 진박 공천으로 리더보다 충성파만 골랐다. 국회를 등진 일류 보수는 방관자다. 게다가 이번 선거로 인물난은 더 심해졌다. 보수를 보수할 보수가 도무지 눈에 띄지 않는다.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엔 외부의 젊은 새 얼굴로 가자는 목소리가 넘친다. 일류 보수가 나라를 떠난 건 아니니까.

‘영 리더’는 사실 전 세계적 현상이다. 가장 빠르고, 강하고, 확실하게 유권자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1970년대 초 궤멸 위기였던 야당을 구한 것도 김영삼·김대중의 ‘40대 기수론’이었다. 문제는 지금 야권이 젊고 참신한 새 인물로 갈 수 있겠느냐는 거다. 안타깝지만 그런 길을 열지 못할 거라는 데서 고민이 시작된다. 새 세력의 등장은 낡은 세력의 퇴장을 의미한다. 그런데 세상이 바뀌어도 똬리를 틀고 버티면서 패자 부활전을 반복한 게 우리 정치사다.

열린우리당 당의장을 뽑는 2006년 2·18 전당대회도 그랬다. 2005년 두 차례의 역대급 재·보선 참패로 과반 의석이 무너지자 당에선 386 운동권의 ‘신 40대 기수론’이 요란했다. 하지만 내세운 거라곤 그저 젊다는 것뿐이어서 연합이나 짝짓기 같은 구태에 의존했다. 당연히 책임을 묻는 사람도, 책임지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곤 석 달 뒤 지방선거와 이듬해 대선에서 대패했다.

왜 그랬던 것일까. 당 개혁이 그저 삿대질로만 흘렀기 때문이다. 10년 뒤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비대위’가 친노 세력 일부를 쳐내며 총선 정국을 주도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친박과 비박이 다투며 40대 기수론이 겉도는 지금 한국당의 처지가 그때와 어슷비슷하다. 40대 합리 보수를 비대위원장으로 모신다 한들 길어야 가을까지 활동할 비대위가 공천권을 가질 리 없다. 인적 쇄신은 실패했던 ‘인명진 비대위’를 따라갈 거다. 그러니 언젠가 음지가 양지 된다며 버티는 기득권이다.

나카소네 전 일본 총리는 불역(不易)과 유행(流行)을 보수의 본류로 강조했다. 변하지 않는 원칙을 갖지만 때론 발전과 전개를 위해 갱신해야 한다는 뜻이다. 보수는 지키기 위해 개혁한다는 에드먼드 버크의 정신과 같은 말이다. 적어도 1970년대 야당의 40대 기수론은 그랬다. 전 세계 40대 지도자도 모두 그랬다. 정치 철학과 지향하는 가치를 확 바꿨다. 그 때문에 기성의 벽을 뛰어넘자는 파격의 주장에 힘이 붙었다. 생각과 자세를 바꾸자는 주장에 국민이 동조했다.

40, 50대 지도자를 모시자는 야당 목소리에 힘이 실렸으면 좋겠다. 더 중요한 건 젊은 지도자가 과감하게 새 부대를 만들 수 있도록 정치 생태계를 바꾸는 일이다. 살생부 권한을 주는 데 모두 동의하면 된다. 계급장만 따지던 과거 정치를 손 봐야 한다. 일회용 쇼에 그쳤던 친노 진보는 2차·3차 쓰나미에 10년간 정권을 내줬다. 한국당의 40대 기수론이라고 다를 게 없다. 미국 공화당의 ‘잃어버린 20년’은 남의 일이 아니다.

최상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