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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중국신화 종이벌레처럼 … 책을 파먹는 할머니 다섯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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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두어자 여인들의 독서 토론 장면. 왼쪽부터 이정임·이선미·한정신·김혜경·사희경씨.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두어자 여인들의 독서 토론 장면. 왼쪽부터 이정임·이선미·한정신·김혜경·사희경씨.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평균연령 65세, 어머니들의 유쾌한 독서 수다였다. ‘두어자 여인들’. 중국 고대신화에 나오는 신기한 종이벌레(두어자)를 모임 이름으로 삼은 이들은 책을 가까이하기 시작한 후 TV를 멀리하게 됐다고 입을 모았다. 셰익스피어의 『햄릿』과 재미 작가 이민진의 현대소설 『파친코』를 한 자리에서 소화했다. 독서 모임 빼고 다른 모임은 전부 정리해버렸다는 회원도 있었다.

책 읽는 마을④ 두어자 여인들 #2006년 결성, 120여권 함께 읽어 #토론 내용 정리한 단행본 내기

모임 좌장 한정신(76)씨가 책 두 권을 보내온 건 지난달 초순께였다. 그간의 독서 모임 활동을 정리한 비매품 『두어자 여인들』, 두어자 모임을 발전시켜 매주 월요일 자신의 집에서 여는 친목·신앙 모임에 관한 『월요카페』(바른북스)였다. 취재해보지 않겠느냐는 초대장이었다.

지난달 30일 한씨의 서울 도산대로(논현동) 자택을 찾았다. 널찍한 거실 한가운데 큼지막한 테이블이 자리 잡고 있다. 두어자 여인들의 현재 회원은 5명. 이들은 이날 오전 『햄릿』에 관한 독서 토론을 끝내고 막 점심을 들려는 참이었다. 샐러드·떡으로 구성된 소박한 식사가 끝나자 모임의 오후 순서, 『파친코』 토론이 시작됐다.

일곱 살 때 한국을 떠난 1.5세대 이민진의 『파친코』는 이씨의 전작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의 속편 격이다. 무대를 미국에서 일본으로 옮겼을 뿐, 새로운 삶의 터전에 온전히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영원한 이방인들, 『파친코』의 경우 재일교포들의 고통스러운 운명을 그린 작품이다. 일본인으로 귀화하지 않고 한국 국적을 유지하는 한 아무리 똑똑해도 잘 돼봤자 파친코 업자라는 슬픈 현실을 담았다.

그런데 파친코는 두 권짜리다. 1·2권을 합치면 800쪽 가까이 된다. 짧다고는 하지만 『햄릿』까지, 한 달에 세 권을 읽고 독서 토론을 하는 것이다.

부담스러운 분량 아니겠느냐는 궁금증은 기자의 기우였다. “이런 건 일도 아니에요. 소설인데, 뭐, 주르르 읽는 거지. 세 권짜리 『전쟁과 평화』도 읽었어요.” 한 회원이 말했다. 다른 회원이 덧붙였다. “『총, 균, 쇠』나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이런 책들이 어렵죠.” 주부 독서단의 독서 목록은 술술 읽히는 소설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묵직한 인문·교양서를 넘나든다.

한씨는 “두어자 여인들을 2006년에 만들었다”고 소개했다. “내 인생은 책과 함께, 라고 감히 말할 정도로 평소 독서를 좋아했는데 주변에 뜻밖에도 독서 모임에 관심 있는 사람이 많았다”고 했다. 한 달에 한 번씩, 모임이 지금까지 읽은 책은 120권이 넘는다. 모임이 끝나면 토론 내용을 한씨가 정리해 공유한다. 『두어자 여인들』은 그중 64권의 토론 결과를 모은 책이다.

토론은 이정임(61)씨의 ‘돌출 발언’으로 아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이 책은 결국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본 사람들에게 차별대우를 받았다는 얘기잖아요. 그런데 왜 소설 중간중간 성적인 묘사를 해놓았는지, 흠집 아닌가요?”

“편협한 책 읽기” “그렇다고 품격 떨어지는 건 아니다”, 비판이 쏟아졌다.

이선미(62)씨는 “1987년 일본을 처음 갔는데 도쿄 신주쿠에서 허름한 복장의 한 아저씨로부터 ‘조센진 아니냐’는 비하 발언을 들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이씨는 대학교 보건학 강사다. KBS PD로 일하다 은퇴한 김혜경(63)씨가 이렇게 받았다. “‘결론은 버킹검’이듯 결론은 파친코!” ‘연식’이 드러나는 발언, 80년대 신사복 광고 카피에 빗대 재일교포들의 삶의 행로가 그렇게 정해져 있다는 뜻이었다.

김씨는 “독서 토론을 해보니 사람이 다시 보인다”고 했다. 좋은 점이 뭐냐, 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사람이 좋아 모임에서 책 얘기를 하다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이전과 다르게 보인다는 뜻이었다.

한씨는 “1년에 90권 정도 읽는다. 이제 어디 가서 무식하다는 소리 안 듣는다”고 했다. 사희경(61)씨는 “얼마 전 회갑 기념 선물로 120권짜리 한길사 그레이트북스 전집을 딸에게 사달라고 해서 받았다”며 “책장을 바라보기만 해도 부자가 된 느낌, 책을 바라보며 행복해하는 모습을 주변에 과시하고 싶다”고 했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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