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낭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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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독일작가「J·G·하만」은 시를『인류의 모국어』라고 했다. 우리는 지금 서울에 앉아서 러시아의 시인「예프투셴코」가 읊조리는「인류의 모국어」를 듣게되었다.
러시아말을 모르는 사람도 한번 듣고 싶다. 시이기 때문에 우리는 언어를 초월해 공감 할 수 있을 것 같다.
소련 만해도 시는 널리 대중들에게 애송되고 있는 모양이다.「예프투셴코」의 시 낭송에 3만 명이 모였다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실제로「푸슈킨」같은 시인의 동상이나 묘소 앞에는 언제나 그의 시를 줄줄 외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고 한다.
우리 나라도 시 낭송은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시조의 창은 격조나 운율로 보아 세계의 어떤 시 낭송보다도 빛난다. 창의 음절 하나를 놓고 보아도 지르기, 조르기, 들어뽑기, 늦추기, 띄우기 등기법이 절묘하다. 평조곡의 경우 풍도를 따지고 창조를 찾는다.
일제의 압박 속에서 시조는 거의 말살의 지경에까지 갔었지만 요즘은 그 창이 젊은 사람들까지 불러들이고 있다.
시는 원래 음악과 조형예술과의 중간에 자리한 종합예술이다. 그 점에서도 시 낭송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문학의식이다.
프랑스의 샹송은 지금 대중가요로 더 알려져 있지만 그 뿌리는 짧은 서정시의 낭송이었다. 사랑의 노래, 술의 노래 등이 유행가의 성격이라면 풍자의 노래는 시적인 분위기가 지배한다.「예프투셴코」는 좋은 시와 나쁜 시를 음향으로 구별하고 있다.
좋은 시는 마치 고드름이 바람에 흔들려 찰랑거리는 소리, 바닷가에서 조개껍질을 귀에 댔을 때 들리는 소리, 이를테면 떨림의 소리 (바이브레이션)를 낸다. 그러나 나쁜 시는 녹슨 칼을 깨진 유리조각에 비벼댈 때와 같은 소리를 낸다고 했다. 그가 얼마나 운율에 예민한 시인인가를 알 수 있다.
그는 러시아어가 영어보다 15배나 운율의 잠재성을 더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소련사람들은 시를 좋아하는 것일까. 그런 기준이라면 우리말도 운율에서는 어느 나라 말에 뒤지지 않는다.
우리 나라에서도 요즘 10만권이 넘는 베스트셀러 시집이 있었다. 시를 많이 읽는 국민은 그 만큼 정신의 세계도 맑고 건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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