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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트럼프 담판…사진으로 보는 북·미 관계 10대 장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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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8월 4일 억류된 미국 여기자들의 석방을 위해 평양을 방문한 빌 클린턴( 앞 줄 왼쪽) 전 미 대통령 일행과 김정일(앞 줄 오른쪽) 국방위원장의 기념사진. [평양 조선중앙통신]

2009년 8월 4일 억류된 미국 여기자들의 석방을 위해 평양을 방문한 빌 클린턴( 앞 줄 왼쪽) 전 미 대통령 일행과 김정일(앞 줄 오른쪽) 국방위원장의 기념사진. [평양 조선중앙통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마침내 마주 앉았다. 1948년 남과 북이 38선을 경계로 단독 정부를 수립한 지 70년, 1950년 북한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68년 만이다.

긴 시간 북한과 미국은 줄곧 서로에 적대적이었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렀고, 북한의 도발로 일촉즉발의 위기를 수차례 맞았다.
냉전이 종식되면서는 한때나마 새로운 길이 열리는 듯했다. 회담과 협상을 거듭하며 합의(1994년 제네바 합의)도 도출했다.

북한의 세습 권력자들.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중앙포토]

북한의 세습 권력자들.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중앙포토]

이후에도 양국 관계는 급진전하는 듯하더니 얼어붙었고, 다시 대화를 시작한다더니 이내 파국을 맞았다. 합의와 파기가 반복되면서 양국 관계는 영원히 회복 불능인 것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대화의 물꼬는 갑작스레 터졌다. 회담 개최를 선언한 지 3개월 만에 양국 정상은 얼굴을 마주했다. 이번 북·미 정상회담이야말로 양국 관계 역사를 새로 쓸 수 있는 중대 기로인 셈이다.

AP통신은 세기의 담판을 맞아 북·미 관계의 흐름을 좌우한 역사 속 장면 10개를 추렸다. 극단의 대립과 팽팽한 긴장 속에 희망과 절망을 거듭했던 역사의 사건들을 들여다봤다.

1950년 한국전쟁 

1950년 6월 4일 북한의 피난민들이 평양 대동강 다리를 건너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북진하며 북한군을 몰아내던 미국 주도의 유엔군은 중공군의 참전으로 승리를 내줘야 했다. [AP=연합뉴스]

1950년 6월 4일 북한의 피난민들이 평양 대동강 다리를 건너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북진하며 북한군을 몰아내던 미국 주도의 유엔군은 중공군의 참전으로 승리를 내줘야 했다. [AP=연합뉴스]

1950년 6월 25일 이른 새벽 북한의 기습적인 침공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약 3년 동안 민간인 100만 명을 포함, 최소 200만 명이 죽거나 실종됐다.

당시 미국의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전쟁 발발 약 하루 만에 미국의 참전을 결정했다. 미군이 주축이 된 유엔군은 한때 북진하며 북한군을 몰아냈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밀려나면서 다 잡았던 승리를 놓쳤다.

전쟁 중단을 합의한 것도 교전 당사국인 북한과 미국, 그리고 중국이었다. 한국전쟁 정전협정 조인식에서 북·미 양국은 악수도, 의례적인 기념촬영도 없이 문서에 서명만 하고 11분 만에 헤어졌다.
미 국방부에 따르면 한국전쟁의 미군 전사자 수는 약 3만 6000명에 이른다.

1968년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

2006년 6월 북한의 군인들이 대동강변에 전시된 미 해군의 푸에블로호를 보고 있다. 1968년 푸에블로호를 나포한 뒤 미국의 사과까지 받아낸 북한은 이를 대미 항전 승리의 상징으로 여긴다. [AP=연합뉴스]

2006년 6월 북한의 군인들이 대동강변에 전시된 미 해군의 푸에블로호를 보고 있다. 1968년 푸에블로호를 나포한 뒤 미국의 사과까지 받아낸 북한은 이를 대미 항전 승리의 상징으로 여긴다. [AP=연합뉴스]

1968년 1월 23일 미 해군 정찰선 푸에블로호가 동해 상에서 북한에 나포됐다. 승조원 83명 중 1명은 나포 과정에서 총격으로 사망했으며, 나머지 82명은 포로로 억류됐다.
이들은 11개월간 북한에 억류됐다가 공개적으로 “북한 영해를 불법 침범했다”고 인정한 뒤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이후 북한은 푸에블로호를 평양 대동강 변으로 옮겨 ‘대미 항전 승리’의 선전물로 활용하고 있다.

나포 사건 발생 이틀 전엔 북한군 특수부대원 30여명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청와대 인근까지 침투한 이른바 ‘1·21사태’가 발생했다. 서울 한복판에 중무장한 북한의 특수부대가 들이닥치고, 불과 이틀 뒤엔 동해에서 미 해군 함정이 나포당하면서 당시 한반도 정세는 전쟁 전야를 방불케 했다.

1976년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1975년 8월 18일 판문점 내 공동경비구역에서 북한군의 만행으로 미군 2명이 참혹하게 살해됐다. [중앙포토]

1975년 8월 18일 판문점 내 공동경비구역에서 북한군의 만행으로 미군 2명이 참혹하게 살해됐다. [중앙포토]

1976년 8월 18일 북한군이 판문점 내 공동경비구역(JSA)에서 나무를 가지치기하던 미군 장교 2명을 살해했다. 당시 북한군은 주먹과 곤봉을 이용해 마구잡이로 폭행을 가하는가 하면, 벌목 도끼를 휘둘러 미군을 참혹하게 살해했다.

이에 미국은 B-52 폭격기 등을 DMZ 인근까지 접근시켜 무력시위를 벌였다. 사건 직후엔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던 북한은 분노한 미국이 한반도에 동원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병력을 총동원하며 준전시 체제까지 갖추자 입장을 바꿔다. 김일성 주석이 직접 유감을 표명한 것이다.

1994년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방북

1994년 6월 16일 북한을 방문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왼쪽에서 세번째)이 김일성 주석(가운데)과 기념촬영하고 있다. [AP=연합뉴스]

1994년 6월 16일 북한을 방문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왼쪽에서 세번째)이 김일성 주석(가운데)과 기념촬영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방북 직전 한반도는 일촉즉발 상황이었다.
그해 3월 북한은 이른바 “서울 불바다” 발언을 했다. 이어 핵연료봉 인출을 강행하고 6월 8일엔 국제원자력기구(IAEA)에서 전격 탈퇴했다. 한반도 전쟁 위기감은 최고조에 달해 미국은 영변 핵시설 폭격과 주한미군 가족들의 우선 철수 등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6월 15일 카터 전 대통령은 전격적으로 북한을 방문했다. 그는 김일성 주석을 만나 핵개발 동결과 핵사찰 원상복귀에 전격 합의했고, 전쟁 일보 직전의 한반도는 한숨 돌릴 수 있었다.

1994년 제네바 합의 도출

1994년 10월 18일 미국 백악관에서 빌 클린턴 전 대통령(왼쪽)이 당시 제네바 합의 미국측 수석 대표였던 로버트 갈루치 전 미국 북핵 특사와 기자회견하고 있다. [AP=연합뉴스]

1994년 10월 18일 미국 백악관에서 빌 클린턴 전 대통령(왼쪽)이 당시 제네바 합의 미국측 수석 대표였던 로버트 갈루치 전 미국 북핵 특사와 기자회견하고 있다. [AP=연합뉴스]

1991년 북·미 고위 관리단이 워싱턴에서 첫 접촉을 한 이후 3년간 뉴욕과 제네바에서 3차에 걸친 북·미 고위급 회담이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하면서 전운이 감돌기도 했지만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방북으로 대화 분위기는 이어졌다.

결국 1994년 10월 미국과 북한은 제네바 합의에 도달했다. 북한이 경수로와 에너지를 공급받는 대신 핵 활동을 동결하고 영변 핵시설을 해체하기로 한 것이다.
당시 미 대통령이었던 빌 클린턴은 북핵 해결에 적극적이었다. 회담과 협상을 이어갔고, 핵 전문가를 북한에 파견해 핵시설 사찰 등 수순을 밟으며 신뢰 회복과 경제협력을 약속했다.

그러나 제네바 합의는 북한이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가동하고 있다는 의혹이 불거지면서 2004년 폐기됐다.

2000년 조명록 차수 워싱턴 방문

2000년 10월 김정일 특사로 미국을 방문한 조명록 총정지국장(차수)이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면담하고 있다. 북미는 당시 적대관계 청산을 담은 공동 코뮤니케를 발표했다. [중앙포토]

2000년 10월 김정일 특사로 미국을 방문한 조명록 총정지국장(차수)이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면담하고 있다. 북미는 당시 적대관계 청산을 담은 공동 코뮤니케를 발표했다. [중앙포토]

2000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조명록 국방위 제1부위원장을 대미 특사로 워싱턴에 파견했다.
조명록은 10월 9~12일 미국에 머무르며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을 만나 획기적인 북·미 관계 개선 의지와 구체적인 안을 담은 김정일의 친서를 전달했다. 두 사람은 북한의 미사일 발사 중지, 평양·워싱턴에 연락사무소 상호 개설 등 국교 정상화 문제도 논의했다.

조명록은 회담 뒤 매들린 올브라이트 당시 국무장관이 주관한 만찬에서 “공화국(북한)의 자주권과 안전에 대한 미국의 담보만 확인되면 (김정일이) 대립과 적의의 조·미 관계를 평화와 친선관계로 전환할 수 있는 중대 결단을 내릴 것”이라고 천명했다.

2000년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 방북

2000년 10월 23일 북한을 방문한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 국무장관(왼쪽)이 김정은 국방위원장과 기념촬영하고 있다. [AP=연합뉴스]

2000년 10월 23일 북한을 방문한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 국무장관(왼쪽)이 김정은 국방위원장과 기념촬영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매들린 올드라이트 전 미 국무장관이 2000년 10월 23일 방북했다. 북한 정부 수립 이후 평양을 방문한 최고위급 미국 관료였다. 그는 2박 3일간 북한에 머무르며 김정일 국방위원장 등 북한의 최고위급 인사들과 만나 미사일·테러지원국 해제문제, 상호 연락사무소 설치 방안 등을 논의했다.

조명록의 방미에 이은 올브라이트 방북으로, 북·미 관계는 수교 직전까지 급진전됐다. 첫 북·미정상회담도 목전에 둔 듯했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조지 W 부시 공화당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동력을 잃은 방북 계획은 취소됐고, 북·미 정상회담은 무산됐다.

6자회담 9·19 공동성명

2003년 8월 27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6자회담에 앞서 기념 촬영 중인 각국 대표단. [AP=연합뉴스]

2003년 8월 27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6자회담에 앞서 기념 촬영 중인 각국 대표단. [AP=연합뉴스]

2001년 9·11 테러가 발생한 뒤 미국의 대북정책의 기조는 완전히 바뀌었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은 북한을 이라크·이란과 함께 ‘악의 축’이라고 선언했다. 더구나 제네바 합의는 사실상 파기된 상태였고, 북한이 2003년 1월 NPT 탈퇴를 발표하면서 2차 북핵 위기까지 찾아왔다.

미국과 북한의 관계가 악화되자, 2003년 중국이 중재에 나섰다. 한반도를 둘러싼 6자(한국·북한·미국·중국·러시아·일본) 회담을 제안한 것이다. 2003년 8월 27일 첫 만남 이후 2005년까지 이어진 회담은 북한이 모든 핵무기를 파기하고 IAEA와 NPT로 복귀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9·19 공동성명’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합의 1년여 만에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하고 핵실험을 단행하면서 무위로 돌아갔다.

김정은 집권 후 핵실험

핵무기병기화 사업을 현지지도하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2017년 9월 조선중앙TV가 보도했다. [중앙포토]

핵무기병기화 사업을 현지지도하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2017년 9월 조선중앙TV가 보도했다. [중앙포토]

2011년 12월 김정일 위원장의 사망으로 김정은 위원장이 집권했다. 그는 집권 이후 약 6년간 아버지의 유훈에 따라 핵무기 완성에 ‘올인’했다.

그 결과 잇따라 시험발사에 성공한 ‘화성’ 계열 탄도미사일에 대해 북한은 ‘대륙간탄도로켓’이라고 명명할 수 있게 됐다. 대륙을 넘어 타격할 수 있는 ICBM이라는 뜻이다. 핵실험도 잦아졌다. 김정일 시대 때는 두 차례 핵실험이 실시된 데 반해 김정은 집권 후엔 4번의 핵실험이 이어졌다.

당연히 북·미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은 거친 비난과 막말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위협했고, 북한의 돌발행동에 대한 국제 사회의 우려도 커졌다.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 방미  

지난 1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 백악관을 방문한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친서를 전달했다. [사진 댄 스카비노 백악관 소셜미디어국장 트위터]

지난 1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 백악관을 방문한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친서를 전달했다. [사진 댄 스카비노 백악관 소셜미디어국장 트위터]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이 지난 1일 백악관을 방문해 트럼프 대통령에게 김정은 위원장의 친서를 전달했다. 김 부위원장의 방미는 평창 겨울 올림픽을 기점으로 급변한 북·미 관계가 정상회담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마지막 열쇠였다.

친서를 받은 트럼프 대통령은 12일 싱가포르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만나겠다고 공식 확인했다. 지난 3월 북·미 정상회담 개최를 발표한 뒤 롤러코스터를 타던 회담 일정이 최종 확정된 것이다.
홍주희 기자 honghong@joogn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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