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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 34발 원폭 공격 추진 … 김일성 핵 집착 그때 시작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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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북·미 정상이 12일 역사적 첫 회담을 갖는다. 최대 초점인 북핵 문제는 어떻게 생겨나 북·미 양자 관계의 대립축이 됐을까.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에 걸친 대미 핵 대결과 북·미 관계사를 짚어봤다.

“원폭 공포에 피난민 수백만 남으로” #64년 마오에 핵기술 요청했다 퇴짜 #김일성 플루토늄, 김정일 HEU 개발 #김정은, 수소탄·ICBM으로 핵 완성 #트럼프와 핵담판 3대 매듭 풀 기회

◆1950=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1월 30일.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핵무기 사용을 적극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핵은 무기의 하나”라고 했다.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은 그해 성탄절 전야에 34발의 원자탄을 요청했다. 목표 지점은 북측 전장과 만주와 연해주 등 21개 도시가 포함됐다. 건의는 묵살됐다. 이듬해 4월 5일. 미 합참은 중국군의 대규모 월경이나 소련 폭격기의 공격이 있을 경우 핵 보복을 명령했다. 그 엿새 후 트루먼은 맥아더를 해임했다. 맥아더의 거듭된 명령 불복종만이 아니라 핵무기를 맡길 믿을만한 지휘관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석좌교수). 맥아더 후임 매튜 릿지웨이 대장은 5월에 38발의 원자탄을 요청했지만, 승인을 얻지 못했다. 북한 남침의 배후이자 핵보유국 소련이 정전협정 체결(53년)을 언급한 것은 그 언저리였다.

김일성의 6·25 전쟁은 ‘한반도 문제’의 원점이다. 남·북, 북·미 대결이 본격화했다. 북핵 문제의 기점이기도 했다. 미국의 핵 사용 검토로 북에서 남으로 수백만 명 규모의 피난민 행렬이 생겨났다(북한 외무성 비망록). 태영호 전 주영국 북한 공사는 “피난민 행렬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본 김일성은 핵무기의 위력을 절감했다”고 말했다. 김일성의 원자탄 집착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북·미 관계는 핵과 정전 체제를 축으로 배타적 대결과 적대적 공존이 씨줄 날줄로 얽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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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김일성은 핵 개발을 위해 소련으로 눈을 돌렸다. 56년 소련 두브나 핵연구소로 과학자를 보냈다. 65년엔 소련 지원으로 IRT-2000 실험용 원자로를 완공했다. 그렇다고 소련이 김일성에 군사의 핵 기술을 넘긴 것은 아니었다. 미국은 58년 주한미군에 전술핵을 들여왔다. 배치는 냉전 붕괴 직후인 91년까지 계속됐다. 김일성은 64년 중국의 핵 실험 성공 후 마오쩌둥(毛澤東)에 핵 개발 지원을 요청했다가 단호히 거절당했다. (돈 오버도퍼, 『두 개의 한국』). 김일성은 비밀 핵 개발의 마라톤에 나섰다.

◆1968=60~70년대는 6·25전쟁 이래 북미 간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다. 북한은 68년 1월 청와대 기습 이틀 만에 미 해군 첩보선 푸에블로호를 나포했다. 선원들 석방은 11개월 만에야 이뤄졌다. 북한이 지금도 평양에 전시 중인 푸에블로호는 북·미 적대관계의 한 상징물이다. 북한은 69년 4월엔 미 해군 정찰기 EC-121기를 격추했다. 미국은 당시 핵 사용 작전계획까지 짰지만, 전면전 우려로 철회했다. 76년엔 북한 병사의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한·미 연합 야외기동 팀스피릿 훈련(76~93년)이 시작됐다. 북한 경제는 여기에 맞대응하다 곤두박질쳤다.

1994년 카터 전 미국 대통령(왼쪽)이 평양에서 김일성 주석과 대화하고 있다. 이 면담을 통해 북핵 1차 핵위기가 해소됐다.

1994년 카터 전 미국 대통령(왼쪽)이 평양에서 김일성 주석과 대화하고 있다. 이 면담을 통해 북핵 1차 핵위기가 해소됐다.

◆1994=북핵 문제가 불거진 것은 김일성 집권 말기다. 김일성은 80년대 핵무기 원료인 플루토늄 생산 주기(週期)를 완성했다. 5㎿ 원자로와 재처리시설을 독자 건설했다. 북한은 85년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했다. 미국과의 교감을 거친 소련의 압력 때문이다. 이때부터 북한 핵 개발은 비확산 체제의 벽에 부딪혔다. 북한이 93년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특별사찰 요구를 거부하고 NPT를 탈퇴하면서 1차 북핵 위기가 발생했다.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이 94년 6월 영변 핵시설 폭격을 검토했던 위기다. 그달 지미 카터 전 미 대통령의 방북은 극적 반전을 가져왔다. 김일성이 핵 시설 동결 의사를 밝혔다. 94년 10월 북·미 제네바 합의는 그  산물이다. 북핵 동결과 보상이 핵심인 이 합의는 클린턴 임기말까지 지속했다. 북·미는 2000년 10월엔 적대관계 청산을 담은 공동 코뮤니케를 발표했다. 12일의 북·미 정상회담에서 토대가 될 가능성이 큰 문건이다. 제네바 합의는 결과적으로 김정일이 시간을 번 틀이었다. 김정일은 이를 통한 남북, 북·미 데탕트와 에너지 지원으로 고난의 행군 시기를 돌파했다. 그러면서 핵무기의 또 다른 루트인 고농축 우라늄(HEU) 개발로 내달렸다.

2000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오른쪽)이 방북한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을 영접하는 모습. [AP=연합뉴스]

2000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오른쪽)이 방북한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을 영접하는 모습. [AP=연합뉴스]

◆2002=북한이 2002년 10월 미국에 HEU 프로그램을 시인하면서 2차 북핵 위기가 일어났다. 제네바 합의는 파탄 났다. 이때부터 합의와 번복의 악순환이 되풀이됐다.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대테러전 관점에서 북핵을 다뤘다. 2001년 9·11 동시 테러 때문이다. 핵 물질 생산보다 이전(transfer)에 촉각을 세운 이유다. 그러나 부시는 북핵에만 매달릴 수 없었다. 아프가니스탄·이라크 전쟁과 전후 처리에 발목이 잡혔다. 2003년 6자회담이 생겨난 한 배경이다. 6자회담은 2005년 9·19 공동성명을 채택했다. 북한의 모든 핵 포기와 북미 관계 정상화 등을 담은 역사적 합의다. 그러나 북핵 시설 불능화(disablement) 단계에서 좌초했다. 사찰과 검증의 벽을 넘지 못했다. 그 새 6자회담은 죽었다. 2차 핵위기는 김정일의 수세 속에서 시작됐다. 하지만 국제사회는 그에 농락당했다. 김정일은 두 차례 핵실험을 하고 장거리 미사일도 시험 발사했다.

지난해 7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화성-14형’ 미사일 발사에 성공 뒤 기뻐하고 있다. [노동신문]

지난해 7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화성-14형’ 미사일 발사에 성공 뒤 기뻐하고 있다. [노동신문]

◆2017=김정은은 핵·미사일 개발을 가속화했다. 수소탄을 포함한 네 차례 핵실험을 하고 중·장거리 탄도미사일을 고루 갖췄다. 헌법에 핵보유국을 명기하고 핵·경제 병진 노선을 채택했다. 지난해 11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화성 15형 발사 후엔 핵 무력 완성을 선언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최대한 대북 압력과 군사 옵션 검토에 맞서면서다. 1차 위기가 김일성의 플루토늄 추출, 2차가 김정일의 HEU 계획이 촉발했다면 3차 위기는 김정은의 ICBM 개발이 불렀다. 트럼프·김정은은 서로 핵 단추를 자랑하는 지경까지 갔다. 그런 두 정상의 12일 회담은 대반전이다. 1950~51년 미국의 핵 사용 위협과 확전 우려가 휴전을 재촉했던 한반도 상황과 지금의 정세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닮은 구석이 있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회담은 북·미 대결 축인 북핵을 폐기하고, 정전체제를 불가역적 평화 체제로 돌릴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

오영환 군사안보연구소 부소장·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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