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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거 아파트에서 삶을 발굴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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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7호 08면

베니스 비엔날레 건축전에서 만난 작가 서도호

제16회 베니스 비엔날레 건축전이 5월 26일부터 11월 25일까지 열린다. 베트남 건축가 보 트롱 니야가 본전시를 위해 출품한 대나무 설치물이 아르세날레 전시장 야외에 놓여 있다. [AP=연합뉴스]

제16회 베니스 비엔날레 건축전이 5월 26일부터 11월 25일까지 열린다. 베트남 건축가 보 트롱 니야가 본전시를 위해 출품한 대나무 설치물이 아르세날레 전시장 야외에 놓여 있다. [AP=연합뉴스]

영국 런던의 동쪽, 가난한 동네로 손꼽히는 포플라(Poplar)에는 곧 소멸을 앞둔 집이 있다. 1972년 영국 건축가 앨리슨과 피터 스미슨 부부가 디자인한 공동 주택 ‘로빈 후드 가든(Robin Hood Gardens)’이다. 가운데 정원을 두고 V자 모양으로 서 있던 두 동짜리 건물은 최근 한 동이 철거됐고, 나머지 한 동도 곧 철거될 예정이다.

지난달 26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개막한 제 16회 베니스 비엔날레 건축전(11월 25일까지)에서 화제의 중심은 바로 이 집이었다. 영국 빅토리아앤알버트(V&A) 뮤지엄이 본 전시의 특별전으로 ‘로빈 후드 가든: 역전의 파멸(Robin Hood Gardens: A Ruin in Reverse)’을 전시하면서다.

전시는 철거 직전 레이저로 잘라내 박물관이 수집한 건물 일부와 집 내부를 고화질로 찍은 영상물로 이뤄졌다. 영상은 ‘집 속의 집’ 연작으로 유명한 설치 미술가 서도호(56)의 작품이었다. 곧 사라질 공간에서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삶을 묵묵히 담아낸 서 작가를 중앙SUNDAY S매거진이 베니스 현장에서 만났다. 올해 건축전에서 화제가 됐던 주요 국가관의 전시도 둘러봤다.

철거되기 전 로빈 후드 가든 서쪽 동의 모습. V&A 박물 관이 사진의 하얀 점선 부분을 잘라 수집했다

철거되기 전 로빈 후드 가든 서쪽 동의 모습. V&A 박물 관이 사진의 하얀 점선 부분을 잘라 수집했다

‘로빈 후드 가든’ 전시는 과거 베니스의 국영 조선소이자 무기고였던 아르세날레에서 열렸다. 옛 벽돌 건물 끄트머리에 있는 전시 공간 앞에는 지지를 위해 가설 비계를 댄 콘크리트 블록이 놓여 있었다. 로빈 후드 가든에서 잘라낸 3개 층이었다. 철거된 10층의 서쪽 타워 어딘가에 있었을, 그리고 누군가의 집이었을 공간은 이렇게 파편으로 남았다.

V&A 박 물관은 잘라낸 아파트 3개 층을 이번 건축전에 내놓았다.

V&A 박 물관은 잘라낸 아파트 3개 층을 이번 건축전에 내놓았다.

이 아파트는 건축가 르 꼬르뷔지에의 공동주택 이상향을 잘 구현했고, 프리캐스트 기법(콘크리트 블록이나 슬라브를 공장에서 미리 제작해 현장 조립하는 것)으로 제작됐다는 점 덕분에 보존 캠페인이 열리기도 했다. 하지만 지역 슬럼화로 전면 재개발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관철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V&A 박물관은 철거될 서쪽 건물의 3개 층, 3세대 공간을 잘라 수장고에 보관했다. 아파트가 박물관의 수집품이 된 것이다.

서도호, 거주민의 에너지를 영상으로 옮기다

전시장 내부는 칠흑처럼 어두웠다. 길이가 13m에 달하는 스크린에서만 빛이 쏟아졌다. 영상은 수직ㆍ수평으로 아파트 내부를 천천히 훑었다. 철거를 앞둔 7층 규모의 동쪽 타워의 어느 방에는 누군가 잠잤던 흔적이 가득한 침대와 널려진 빨래가 보였다. 어떤 집에서는 요즘 유행하는 벽걸이 무선 청소기도 보였다. 같은 구조의 공간이라도, 깃들어있는 삶은 모두 달랐다. 영상 속 공간에는 사람의 흔적이 가득하지만, 이 삶터는 이제 곧 사라진다. 작가가 일부러 고해상도로 찍은 영상은 천천히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건물과 인간의 삶을 어떻게 분리할 수 있는가.”

서도호 작가의 개인전이 베니스의 빅토리아 미로 갤러리에서 7월 7일까지 열린다.

서도호 작가의 개인전이 베니스의 빅토리아 미로 갤러리에서 7월 7일까지 열린다.

서 작가는 “세 가구와 빈 집 한 곳을 포함해 총 4세대의 내부를 6일에 걸쳐 찍었다”며 “한 집당 수천 장의 고해상도 스틸 사진을 공들여 찍었고, 이를 연결해 영상으로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처음부터 동영상으로 찍지 않고 손 많이 가는 아날로그 방식을 택한 것은 “아파트와 거주민의 긴 역사를 존중하고 싶어서”라고 덧붙였다. 로빈 후드 가든에는 한때 1575세대까지 살았지만 현재 23가구만 남았다.

서도호 작가

서도호 작가

어떻게 참여하게 됐나.  
“뉴욕에서 20년간 살던 아파트 내부를 종이로 감싸 탁본 뜨듯 색을 덧칠하는 작업을 하면서 영상으로 공간 기록도 했다. 이를 본 V&A 뮤지엄 큐레이터가 연락을 줬다. 철거될 아파트의 내부를 찍고 작가의 해석을 보여달라고. 건물이 지어진 이후 수십 년간 산 사람들, 그 삶의 흔적을 어떻게 기록해야할지 고민스러웠다. 눈에 안 보이는 기억과 에너지가 공간 속에 응축되어 있다고 봤다. 최대한 객관적인 시각으로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촬영에 들어갔다.”  
촬영한 집을 선택한 기준이 있었나.  
“박물관 측에서 가가호호 방문했다. 프로젝트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이들의 집을 찍었다. 현재 거주하고 있는 세 집의 경우 은퇴한 영국 부부, 방글라데시에서 온 부부 등이 살고 있었다. 한 집서 대략 하루 종일 찍었고, 빈 집의 경우 3일에 걸쳐 촬영했다. 네 집 모두 3D 스캔도 했다. 동영상 카메라로 찍었다면 한 집당 한두 시간이면 끝났을 거다.”  
전시장 안에서는 서도호 작가가 촬영한 로빈 후드 가드 내부의 모습이 가로 13m 짜리 스크린을 통해 상영되고 있다.

전시장 안에서는 서도호 작가가 촬영한 로빈 후드 가드 내부의 모습이 가로 13m 짜리 스크린을 통해 상영되고 있다.

건물 한 동은 이미 철거됐다.  
“올 1월에 촬영하러 갔을 때, 서쪽 동이 반쯤 헐린 상태였다. 거주 환경이 열악했다. 전후 시대 우리가 살던 환경보다 못한 느낌이랄까. 남아 있는 주민들도 곧 오래된 삶터를 떠나야하는 입장이었다. 영상의 마지막은 노인의 발코니 너머로 건물을 부수고 있는 굴착기와 그 너머 우뚝 서 있는 런던 금융 신도시의 마천루가 보이는 장면이다.”  
정지된 화면 없이 영상이 계속 수직ㆍ수평으로 한결같이 흐른다.  
“결국 몸의 움직임에 따라 우리가 공간을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인생도 연속적인 움직임으로 이뤄지는 것 아닌가.”  

서 작가는 베니스의 빅토리아 미로 갤러리에서 7월 7일까지 개인전도 열고 있다. 10년간 꾸준히 방문한 싱가포르 아티스트 레지던시 STPI에서 쓰던 물건을 종이로 탁본한 작품들이었다. 헤어드라이어ㆍ문고리 등을 종이로 떠서 베니스로 옮겨왔다. 서 작가는 “공간에 축적된 사람들의 에너지와 역사ㆍ추억을 어떻게 하면 고스란히 다른 곳에 옮길 수 있을까에 관심이 많다. 이번 로빈후드 가든 전시도 같은 맥락”이라고 설명했다.

올해 건축전에 참여한 63개 국가관 중 황금사자상을 받은 스위스관의 모습. 관람객은 거인국과 소인국을 오가는 경험을 하게된다

올해 건축전에 참여한 63개 국가관 중 황금사자상을 받은 스위스관의 모습. 관람객은 거인국과 소인국을 오가는 경험을 하게된다

건축전 주제는 ‘자유공간’ 건축가여, 인류에 기여하라    

한국기술개 발공사의 구로무역박람회 프로젝트를 재해석한 건축스튜디오 바래의 한국관 설치물 [사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기술개 발공사의 구로무역박람회 프로젝트를 재해석한 건축스튜디오 바래의 한국관 설치물 [사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올해 비엔날레 총감독을 맡은 아일랜드 건축가 이본 파렐과 셀리 맥나마라(그라프톤 건축사무소 공동대표)는 ‘자유공간’을 주제로 한 선언문을 발표하면서 고대 그리스 속담을 인용했다. “자신이 그늘에서 쉴 수 없음을 알면서도 노인이 나무를 심을 때 그 사회는 발전한다.”

자유공간, 즉 의미 있고 인류에 기여할 수 있는 공간을 둘러싼 해석의 여지는 넓었다. 마치 ‘무제’와도 같은 주제를 놓고 올해 건축전에서는 난장이 펼쳐졌다.

전시장을 비우고 옥상으로 올 라가게 한 영국관 앞에 관람객들이 줄을 서있다.

전시장을 비우고 옥상으로 올 라가게 한 영국관 앞에 관람객들이 줄을 서있다.

가장 큰 위트를 안겨준 곳은 영국관이었다. 아무 것도 전시하지 않았다. 전시장 내 6개 방을 그야말로 텅 비웠다. 대신 건물 위 가설 옥상을 설치해 올라갈 수 있게 했다. 올라선 옥상에서는 빼꼼이 솟은 기존 건물의 삼각 지붕을 볼 수 있다. 따뜻한 허브티 한 잔도 준다. 작품명은 ‘섬’. 알던 세계가 침몰했을 때 피난처이자 망명처가 될 장소를 참신한 아이디어로 풀어낸 것이다. 영국문화원은 셰익스피어의 작품 『템페스트』의 한 구절을 인용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피하지 마라. 섬에는 즐거움을 주고 상처를 주지 않는 소리와 달콤한 공기가 가득하다.” 영국관은 특별언급상을 받았다.

장막처럼 보이는 검은 패널 뒤 국경지대 건축 프로젝트를 기록한 독일관

장막처럼 보이는 검은 패널 뒤 국경지대 건축 프로젝트를 기록한 독일관

대상인 황금사자상의 영예는 스위스관에 돌아갔다. ‘스위스 240: 하우스 투어’를 주제로 전시장 내 스케일 왜곡이 두드러진 공간을 꾸몄다. 허리를 굽혀 작은 문을 통과하면 갑자기 거대한 싱크대가 있는 공간이 나타나는 식이다. 직관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장점 덕에, 오프닝 기간 내내 긴 줄이 이어졌다. 심사위원단 일동은 “기존 공간 규모에 대한 비판적인 이슈를 던지면서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며 수상 사유를 밝혔다. 국경 지대의 건축 프로젝트를 다룬 독일관처럼 정치적인 이슈로 자유공간을 해석하는 국가관도 있었다.

텅 빈 영국관 실내

텅 빈 영국관 실내

한국관은 ‘스테이트 아방가르드의 유령’을 주제로, 1960년대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기공)의 작업을 발굴하고, 재해석했다. 대규모 토목 공사가 이뤄지며 도시의 틀을 만들어가던 시기, 기공의 사장으로 역임했던 1세대 건축가 김수근의 프로젝트에 주목했다. 모더니즘을 향한 건축가의 이상과 체제 정통성을 건축으로 과시하려 했던 국가의 욕망이 어떻게 충돌했는지 보여주고, 7명의 작가들이 새로운 상상력을 더했다.

지난해 열린 제1회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총감독을 역임했던 배형민 서울시립대 교수(건축학부)는 “근대화 시기와 당시 만들어진 공간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큰 질문 던지는 전시”라고 전했다.  ●

베니스(이탈리아) 글·사진 한은화 기자 onhwa@joongang.co.kr  사진 베니스 비엔날레 재단·한국문화예술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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