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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27년 … 헤밍웨이부터 이창래까지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86호 32면

책 속으로

완전한 번역에서 완전한 언어로

완전한 번역에서 완전한 언어로

완전한 번역에서
완전한 언어로
정영목 지음, 문학동네

‘믿고 읽는’ 전문번역가의 비망록 #번역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 #한국어 매끈하다고 좋은 건 아냐

소설이 국경을 건너는 방법
정영목 지음, 문학동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이름이 생소하지 않을 것 같다. 문학 독자라면 더욱 그렇다. 번역에 관한 에세이와 ‘내가 읽은 책과 세상’이라고 할 만한 책, 이렇게 두 권을 한꺼번에 출간한 번역가 정영목(58·사진)씨 말이다. 얼마 전 타계한 미국 작가 필립 로스, 노벨문학상 작가인 주제 사라마구와 헤밍웨이, 알랭 드 보통과 커트 보니것, 한국계 미국 작가 이창래까지, 그가 번역한 작가 목록은 길다. 문학 바깥으로 눈길을 돌리면 미국의 영향력 있는 법철학자 마사 너스바움 같은 이름도 보인다. 번역 경력 27년의 결과들이다.

소설이 국경을 건너는 방법

소설이 국경을 건너는 방법

우리는 정영목의 번역이라면 신뢰할 만하다며 이런 작가들을 읽어 왔다. 매끄럽게 잘 읽히고, 번역 오류나 오탈자가 없다며 만족해했다. 하지만 그런 가치 판단은 번역에 대한 잘못된 통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게 번역 에세이 『완전한 번역에서 완전한 언어로』에 담긴 정씨의 생각이다. 번역은 맞다, 틀리다, 정오 판정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보다는 좋은 번역, 나쁜 번역, 혹은 개성적인 번역을 이야기해야 한다. 매끄럽게 술술 읽힌다, 같은 평가도 정씨에게는 마뜩잖다. 반질반질한 가독성을 강조하는 규격화된 번역 풍토를 조장해 결국 기존 제도의 순조로운 재생산이라는 음험한 목적에 일조할 수 있다고 의심한다.

정영목씨가 번역한 책들. 필립 로스의 장편 『미국의 목가』, 주제 사라마구의 장편 카인이 보인다. [사진 문학동네]

정영목씨가 번역한 책들. 필립 로스의 장편 『미국의 목가』, 주제 사라마구의 장편 카인이 보인다. [사진 문학동네]

정씨의 관심사는 번역 평가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표피적인 수준이 아니다. 특정 번역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와 반응이라는, 번역 공정의 최종 산물과 관련되는, 결국 바람직한 번역이란 어때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이어진다. 그런데 바람직한 번역은 의역 아니면 직역, 식으로 단순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번역의 본질과 역할, 예술로서의 지위, 언어의 불완전성에 대한 인식, 번역가의 무의식까지, 폭넓은 사안들에 대한 사람들의 총체적인 인식과 관련된 문제다. 특히 텍스트의 의미는 고정된 게 아니다. 결국 텍스트의 내용을 어떻게 이해(해석)하느냐가 관건인데, 이해의 내용에 따라 번역의 내용 역시 달라질 수밖에 없다. 언어의 불완전성을 딛고 출발 언어와 도착 언어 사이의 제3의 언어, 순수하고 절대적인 의사소통을 가능케 하는 번역이 번역자의 길이어야 하며 그 과정에서 번역의 창조성도 얘기해볼 수 있다는 게 정씨의 생각이다. 그래서 ‘완전한 번역’ 추구에서 벗어나 ‘완전한 언어’라고 할 만한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정영목

정영목

이런 모든 논의는 어쩌면 번역계 내부용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수도 있겠다. 전문적인 번역 철학을 왜 소설 독자가 읽어야 하나. 번역은 그만큼 우리 곁에 가까이 있다. 책을 선택하는 유력한 기준 중 하나가 좋은 번역인가다. 한강의 『채식주의자』 오역 논쟁은 많은 사람의 관심사였다. 번역이 결국 언어와 예술, 그와 관련된 인간 제도나 사유와 관련된다면 정씨 주장대로 그건 결국 인간의 문제다.

『소설이 국경을 건너는 방법』은 현대문학의 거장 깊이 읽기다. 정씨가 번역한 존 업다이크, 오스카 와일드, 존 밴빌, 코맥 매카시 등의 소설 세계를 안내한다.

순발력을 발휘한 건지 필립 로스에 대한 글들이 첫 번째로 실려 있다. 영국 가디언지의 온라인 부음 기사는 로스의 생전 발언을 제목처럼 뽑았다. “나는 소설을 썼는데, 사람들은 자서전이라고 한다. 자서전을 썼더니 이번에는 소설이라고 한다. 나는 흐릿하고 사람들은 똑똑하니까 그들이 결정하게 하라.” 정씨의 글을 읽으면 이런 발언을 할 정도로 두드러졌던, 로스 소설의 자전적인 면모를 가늠할 수 있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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