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 131조원어치 보유한 국민연금 나서면…우려 커지는 재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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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이 대한항공에 적극적으로 주주권을 행사하겠다고 나서자 재계는 크게 긴장하고 있다. 정부 입김이 작용할 수 있는 국민연금이 개별 기업 의사결정에 시시콜콜 개입하면 경영 자율성이 크게 훼손될 수 있어서다.

재계에 긴장감이 급속히 퍼지는 것은 국민연금의 투자 규모와 무관치 않다. 국민연금은 국내 주식시장에 131조원(2018년 1분기 말 기준)을 투자하고 있다. 투자 내역을 홈페이지에 공개하고 있는데, 이 자료에 따르면 국민연금이 5% 이상 지분을 보유한 국내 기업만 276개에 달한다. 업종도 전기·전자부터 통신·화학·유통·금융·보험 등 분야를 가지리 않는다. 업종별 우량기업에는 대부분 대주주로 참여하고 있다. 삼성전자(9.2%), SK하이닉스(9.9%), 현대차(8.1%), 네이버(10.6%), LG화학(9.3%), 신한지주(9.6%) 등에서 국민연금은 1대 또는 2대 주주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재계의 우려는 '자율성'과 '효율성'의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한국경제연구원 유정주 기업혁신팀장은 "주주가 기업의 잘못에 대해 정보 공개를 요구하고 지적에 나서는 것은 권리이지만 국민연금은 일반인이나 기관과는 다른 대주주"라고 말했다. 정부가 기금 운용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정권의 성향에 따라서는 연금이 기업을 지배하는 '연금사회주의'에 빠질 수 있다는 얘기다. 유 팀장은 "그간 국민연금이 의결권 행사에 대해 주로 중립의견이나 신중한 입장을 견지한 것도 가급적 기업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려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민연금의 주주권 적극 행사가 기업 경쟁력에 도움이 되는지에 대해서도 재계는 의문을 갖고 있다. 이병태 카이스트 경영학과 교수는 "기관 투자자의 경영 간섭이 기업 이익 증대에 도움이 된 사례는 국내외에서 찾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일각에서는 기업인의 경영권 강화 제도가 없어 국민연금의 힘이 상대적으로 강해진다는 지적도 내놓는다. 재계 관계자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이 국민연금 찬성하에 합병하고, 현대차가 국민연금의 찬성을 확신할 수 없게 되자 지배구조 개편안을 포기한 것은 국내기업이 이미 국민연금에 종속되기 시작했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런 상황에서 국민연금이 주주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면 기업 자율성은 크게 훼손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태희 기자 adonis55@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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