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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마이크는 비겁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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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이건용 작곡가·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

이건용 작곡가·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

열흘쯤 전 일요일 오후 한 시, 나는 덕수궁 옆에 있는 성공회 교회 마당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햇빛 속에서 차를 마시며 담화하는 것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 중의 하나다. 그러나 이날은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엄청난 노래 소음 때문에 망쳤다. 옆 사람과 대화가 힘들 정도, 노래방 안에서 듣는 음악 정도랄까.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오면서 보니 덕수궁 앞에서 최근 입안된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조용함은 천부의 권리 누구도 침해할 수 없어 #다른 목소리를 제압하는 지나친 확성은 폭력

수도 서울의 한복판, 시청부터 광화문에 이르는 지역은 소음특별지역이다. 여기서는 항상 몇 건의 집회가 열리고 있다. 온갖 주장을 하는 온갖 목소리가 들린다. 밤낮이 없고 1인 시위부터 장기농성에 이르기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하기는 촛불집회와 월드컵 응원도 이곳에서 열렸다. 별로 소음을 내지 않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시끄러워서 귀를 막고 지나가야 한다. 천막을 들여다보면 사람은 없고 노래 테이프만 돌아가는 경우도 있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였다고 한다. 보신각에서 치는 종소리가 장안에 다 들렸다니 실제로도 조용했을 것이다. 그러니 오히려 멀고 가까운 데서 여러 가지 소리가 들렸으리라. 개 짖는 소리, 닭 우는 소리, 지금도 있지만, 까치와 여러 종류의 새소리…. 대장간 소리, 행상의 외침, 아이들의 노랫소리…. 그러다가 인경이 울리면 김수영이 『거대한 뿌리』에서 버드 비숍의 기록을 인용하며 찬탄했듯 “장안의 남자들이 사라지고 갑자기 부녀자의 세계로 화하는 극적인 서울”이 되었으리라.

어린 시절 나는 행상들이 부르고 다니는 가락을 많이 들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그들은 골목골목을 누볐다. 두부, 젓갈, 잡화, 엿, 아이스케키, 생선, 메밀묵, 군고구마 등을 가지고. 짐을 메고 끌면서 게다가 큰 소리로 외치려니 힘이 들었으리라. 그들의 외침은 노래가 되었다. 그리고 오래 반복하면서 자신만의 특유한 가락으로 다듬어졌으리라. 나는 위에 열거한 행상들의 외침을 지금도 기억한다. 그 말의 조합이 너무 절묘하고 가락이 멋들어져서 이들을 모아 합창곡을 만들기도 했다.

음악평론가 박용구 선생은 만년 들어 세검정에 ‘세이장(洗耳莊)’을 지었다. 아끼던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집이었으니 그가 얼마나 기뻐했을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 그가 언젠가 내가 방문했을 때 고통을 호소하였다. “트럭 행상들이 마이크를 너무 크게 틀어서 힘들어요.” ‘귀를 씻으며’ 살려 했던 그에게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으리라.

행상은 고된 일이다. 트럭 행상도 마찬가지. 생목소리로 외치고 다닐 수 없다. 문제는 녹음기를 사용하면 끊임없이 되풀이할 수 있고, 마이크를 사용하면 얼마든지 크게 할 수 있다는 점이다. 트럭 행상에겐 편리하지만 “싱싱한 고등어가 두 마리에 만원, 달디단 꿀참외가 한 광주리에 만원…”하고 반복하는 스피커 소음을 5분, 10분 듣다 보면 짜증 나지 않을 수 없다.

조용함은 천부의 권리다. 모든 사람에게 누릴 권리가 있고 누구도 이를 훼손하면 안 된다. 맑은 공기와 같다. 담배 연기로 그 맑음을 훼손하면 안 되듯 소음으로 그 조용함을 깨뜨리면 안 된다. 법적인 규제도 물론 있다. 집회 소음은 주간 75데시벨(dB) 이하로 정해져 있는데 중요한 것은 수치가 아니다. 상식이다. 남이 조용하게 있을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하면 그것은 폭행이라는, 이웃이 담소를 나눌, 생각에 잠길, 무심하게 있을, 멍 때릴, ‘귀를 씻을’ 기회와 권리를 뺏는 것은 범죄라는.

대한민국은 의견이 많은 나라다. 시끄러울 수밖에 없다. 실은 그 덕분으로 나라가 이만큼 성장했다. 광장은 그 시끄러움을 뱉어내게 하는 곳이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외치게 해서 사회를 치유한다. 이곳의 시끄러움으로 나라는 조용해진다. 그러니 원칙이 서야 한다. 상식과 페어플레이와 민주주의의 원칙이. 남이야 뭐라든 자기 소리만을 되풀이하거나 제 목소리를 지나치게 확대하여 남의 목소리를 제압하는 것은 반칙이다. 비겁하다.

이건용 작곡가·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