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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타인의 마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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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6호 35면

고선희 방송작가·서울예대 교수

고선희 방송작가·서울예대 교수

“난 집에 가서 연속극 봐야 해.” 정년퇴임을 몇 달 앞둔 한 어른이 저녁 자리를 물리치고 가시며 남긴 말씀이다. 요즘 TV 드라마에 재미를 붙이셨다는 그분은 남성이고 평생 고전을 연구해온 선비 같으신 분이다. 세상이 변한 건지 그분이 변하신 것인지 어쨌든 그러시는 모습이 내겐 정겹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요즘 내 주변엔 드라마 보는 남성이 부쩍 늘었다. 한 친구의 남편은 요즘 드라마 보며 울기도 한단다, 드라마가 사람을 바꿔놓고 있단다. 남들이 어떻게 사는지 어떤 기분인지, 드라마를 통해서 새롭게 알게 되니까 가족 간 소통도 더 쉬워졌다고 한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공감’이란 타인의 마음을 그 사람의 입장으로 들어가서 느끼고 지각하는 능력이다. 단순히 타인의 감정을 공유하는 게 아니라 타인이 처한 상황과 관점을 이해할 수 있는 해석도 동반하는 것이다. 침팬지에게서도 인간과 유사한 감정과 관계 형성 방식이 발견되지만, 상대방의 마음까지 헤아리는 능력까지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경제학자이자 문명비평가인 제레미 리프킨은 그래서 인류를 공감하는 인간이라는 의미의 ‘호모 엠파티쿠스’라 명명하고 “미래는 공감의 시대가 될 것”이라 한다.

반면에 공감의 중요성이 요즘 더 자주 언급되고 있는 건, 우리의 공감 능력이 그만큼 떨어져 있다는 방증일 수도 있겠다. 최근 논란이 된 재벌가의 이른바 ‘갑질’이나, 청소년의 집단 따돌림, 집단 폭행 등의 뉴스를 접할 때마다, 상대의 고통을 헤아릴 줄 모르는 공감장애를 지닌 인물이 증가하는 것 같아 우려된다. 사이코패스로 판명된 경우도 아닌데 피해자에 대한 진정한 사죄와 반성의 모습을 끝까지 보이지 않고 있는 범죄자들이 적지 않아 두렵다.

삶의 향기 6/2

삶의 향기 6/2

앞의 그 고전연구자에 따르면, 우리글에 쉼표와 마침표 같은 구두점을 제대로 구분해 사용하기 시작한 건 1910년 이후부터였다고 한다. 이전에도 간혹 띄어쓰기 표시를 한 경우가 없진 않으나 서양 문화를 받아들이게 된 이후 우리글에도 구두점을 체계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전에는 쉼표도 마침표도 없이 계속 이어 붙여 쓴 그 글을, 어떻게 오독하지 않고 바르게 읽어낼 수 있었을지…. 생각할수록 옛 어른들의 지혜가 경이롭다. 그 글을 제대로 읽게 해주는 가장 큰 힘은 아마도 글쓴이의 의중을 헤아리는 공감능력이 아니었을까 싶다.

얼마 전 종영된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중년의 남주인공은 이런 독백을 했다, “누가 날 알아, 나도 걜 좀 알 것 같고…. 그래서 슬퍼.” 극 초반 과도한 폭력 장면과 어쩌면 사랑하는 사이가 될 수도 있을 남녀 주인공의 나이차가 너무 크다는 이유로 논란이 되기도 했었지만, 보고 나니 사랑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이야기를 하는 드라마여서 주위에 추천해주고 있다. 남녀 주인공은 세대와 환경과 성별까지 다른 점이 훨씬 많지만, 삶의 무게와 존재의 근원적 쓸쓸함으로 서로 공감한다.

TV 드라마는 양도 많고 질적으로도 매우 다양해서 유익한 드라마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으며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무엇 때문에 갈등하는지, 대중 드라마만큼 쉽게 공감해 볼 기회를 제공해 주는 콘텐트도 드물다.

상대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능력이야말로 삶에 큰 위안이 된다는 사실을, 좋은 드라마는 보여준다. 말년에 TV 연속극 팬이 되셨다는 그 고전연구자께서도 아마 그와 같은 마음으로 드라마를 보고 계신 것 같다. 드라마 속 뻔한 일상의 서사에서 평범하지만 소중한 사람들의 마음을 읽어내고 공감하는 일도 좋은 공부요 연구가 될 수 있겠다. 그래서 더 좋은 드라마가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고 다시 힘내서 살아가고 싶게 만드는 그런 드라마, 타인의 마음에 기꺼이 공감하게 만드는 드라마.

고선희 방송작가·서울예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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