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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홈런왕’ 이영민, 런던올림픽 축구 8강도 이끌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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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5호 22면

스포츠 다큐 - 죽은 철인의 사회

1928년 6월 8일 경성운동장(지금은 사라진 동대문야구장의 옛 이름). 연희전문(현 연세대)과 경성의전(현 서울대 의대)의 야구 정기전이 열렸다. 1회 말 투 아웃, 연희전문의 3번 타자 이영민 선수가 인 코스로 들어오는 공을 힘껏 쳐냈다. 공은 370피트(약 113m)를 날아가 담장을 넘어갔다. 조선 야구 사상 첫 공식 홈런이 나오는 순간이었다.(이영민이 5월 7, 12일에 홈런을 쳤다는 기록도 있다.)

1928년 경성구장 한국 야구 첫 홈런 #미·일 올스타전 베이브 루스와 경기 #경평전 축구 스타 … 국대 감독 맡아 #올림픽서 멕시코 5-3으로 꺾어 #엇나간 셋째아들, 아버지 집 강도 #아들 친구가 쏜 총에 49세로 요절

‘조선의 홈런왕’ 이영민(1905~1954)은 숱한 기록과 기행을 남긴 풍운아였다. 그는 1934년 미·일 야구 올스타에 뽑혀 베이브 루스·루 게릭 등 전설적인 스타들과 경기를 치렀다. 야구 선수로서는 1루수를 제외한 모든 포지션을 소화했고, 육상 400m 조선신기록을 세울 정도로 뛰어난 달리기 선수였다. 축구 국가대표 선수·감독이기도 했다. 매년 고교야구 최고 타율 선수에게 주는 ‘이영민 타격상’으로 기억되는 이영민의 영화 같은 일생을 되짚어 보자.

1925년엔 육상 400m 54초6 조선신기록

1934년 미·일 올스타 전에 출전한 ‘전설의 홈런왕’ 베이브 루스(왼쪽)와 이영민. [사진 한국야구위원회]

1934년 미·일 올스타 전에 출전한 ‘전설의 홈런왕’ 베이브 루스(왼쪽)와 이영민. [사진 한국야구위원회]

대구 출신인 이영민은 계성학교에서 야구·축구·농구·육상 선수로 활약하다 서울로 올라와 배재고보를 다녔다. 연희전문에 입학한 이영민은 본격적으로 만능 스포츠맨의 위용을 뽐내게 된다. 야구·축구 선수로 활약하면서도 1925년 전조선육상경기대회 200m, 400m, 3개 계주(400m·800m·1600m)에서 우승해 5관왕을 차지했다. 400m에서 기록한 54초6은 육상계를 깜짝 놀라게 한 조선신기록이었다.

1929년 식산은행(현 산업은행)에 스카우트된 이영민은 일본인 선수들의 차별과 질시를 뚫고 실력을 드러냈다. 강타자 겸 강속구 투수였던 이영민은 경기 상황에 따라 포수·내야수·외야수로도 뛰었다. 특히 빠른 발과 센스를 앞세운 외야 수비는 일품이었다고 한다. 1932년에는 경성구락부를 흑사자기 조선 예선 우승으로 이끌었고, 도쿄에서 열린 본선에서도 팀을 결승까지 끌어올렸다.

1934년에 미국 메이저리그 올스타팀이 일본을 방문해 일본 올스타와 15차례 경기를 했다. 일본에 프로야구를 시작하기 위한 붐 조성 차원이었다. 베이브 루스·루 게릭·지미 팍스 등 당대 최고의 선수들이 태평양을 건너 왔다. 일본 올스타는 세 차례에 걸쳐 선수를 선발했는데, 이영민은 첫 번째 13명 명단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정작 경기에는 간간이 대주자나 대타로 나섰을 뿐이다. 이영민이 일본인 이름으로 바꾸라는 주최측 제안을 거부하는 바람에 미운털이 박혔다는 설도 있다.

이영민은 은퇴 후 지도자·심판·행정가로서도 왕성한 활동을 했다. 1946년 8·15 해방 1주년 기념 조·미 야구대회도 이영민의 공이 컸다. 당시 미 24군단 잉거프리센 소령이 “만약 조선군이 점수를 낸다면 1점당 볼 10다스를 드리겠다”고 약속했다. 조선 대표팀은 3-5로 졌지만 볼 30다스(1다스=12개)를 받았고, 이를 담보로 은행에서 빌린 돈으로 제 1회 전국중등학교야구선수권대회(현 청룡기 고교야구)를 열 수 있었다고 한다.

1935년 일왕배 결승에서 우승한 경성축구단. 가운데 트로피 왼쪽이 이영민. [이재형 축구자료수집가]

1935년 일왕배 결승에서 우승한 경성축구단. 가운데 트로피 왼쪽이 이영민. [이재형 축구자료수집가]

‘축구인 이영민’은 야구선수 이영민에 가려 잘 부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영민은 연희전문 부동의 골잡이였고, 경평전(경성-평양 축구 정기전)의 스타이기도 했다. 1930년 제 2회 경평전에서 경성팀은 이영민이 골을 넣은 1차전과 3차전을 이겨 종합전적 2승1패로 우승했다. 또한 이영민이 이끈 경성축구단은 1935년 일왕배(일본 최고 축구팀을 가리는 FA컵)에서 우승했다. 90년 역사의 일왕배에서 일본 팀이 아닌 팀이 우승한 건 경성축구단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결승에서 도쿄문리대학을 6-1로 대파한 이영민 주장 겸 감독은 “지금의 일본 팀은 기술이 많이 발전했다. 많은 고민을 한 끝에 역습 형태의 공격을 지시했고 선수들이 이를 잘 따라줬다”고 말했다. 세밀한 상대 분석과 맞춤형 전술로 우승한 것이다.

1947년 당시 이영민.

1947년 당시 이영민.

한국 축구대표팀의 실질적인 초대 감독도 이영민이었다. 1948년 런던올림픽 축구 감독은 박정휘였는데 선수 선발 과정에서 문제가 생겨 전격 경질됐다. 당시 조선야구협회 사찰단 자격으로 런던에 가 있던 이영민이 갑작스럽게 지휘봉을 잡았다. 한국은 멕시코와의 첫 경기에서 5-3으로 승리해 8강 진출을 이뤘다. 스웨덴에는 0-12로 대패했다. 이영민은 한국 축구 올림픽 첫 승 감독으로 대한축구협회 홈페이지에도 등재돼 있다.

이영민은 경성 최고 갑부의 딸이자 이화여전 정구선수였던 이보패와 결혼했다. 그러나 술과 여자를 워낙 좋아한 이영민은 가정을 소홀히 했다. 당대 최고 여배우·기생들과 어울렸고 첩을 두기도 했다. 결국 첫 부인과는 이혼했다.

이영민의 셋째아들 이인섭은 그런 아버지를 미워하고 엇나갔다. 이영민은 아들을 안양 소년감화원에 넣었고, 거기서 인섭은 불량 소년들과 어울렸다. 1954년 8월 12일 새벽, 인섭은 아버지 집에 있는 금고를 털기로 친구들과 모의하고 망을 봤다. 갑자기 총성이 울렸다. 아버지에게 들킨 친구가 엉겁결에 갖고 있던 권총을 쏴 버린 것이다.

망우리 묘역엔 추모 비석만 덩그러니

망우공원묘지를 쓸쓸히 지키고 있는 이영민 추모 비석. [정영재 기자]

망우공원묘지를 쓸쓸히 지키고 있는 이영민 추모 비석. [정영재 기자]

이인섭씨는 6년을 복역한 뒤 출소했다. 그 사이 가족은 모두 미국으로 떠났다. 서울 망우리에 있는 묘소도 가족이 옮겨갔고 유골은 화장했다. 망우묘지공원은 만해 한용운·소파 방정환·시인 박인환 등 근현대사 인물들을 모시고 있다. 이영민의 묘소가 가장 찾기 힘들다. 잡풀이 무성한 그곳에는 대한야구협회가 세운 조그만 비석(李榮敏之墓)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소설 『호므랑 이영민』(도모북스)을 쓴 배상국 작가는 말했다. “가정사의 비극 때문에 야구 원로들도 그분 얘기 꺼내는 걸 쉬쉬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하지만 이영민 선생은 손기정(마라톤)·엄복동(자전거) 선생처럼 식민지 조선의 아픔을 달래주고 희망과 용기를 준 영웅이었다.”

백인천·김일권·최정·김현수 … 고교 때 ‘이영민 타격상’ 받아

1959년 제 2회 이영민 타격상 수상자인 백인천 선생. [정영재 기자]

1959년 제 2회 이영민 타격상 수상자인 백인천 선생. [정영재 기자]

이영민 선생이 작고한 뒤 대한야구협회는 고인의 공적을 기려 ‘이영민 타격상’을 제정했다. 전국 고교야구 대회 규정타석을 채운 선수 중 타율이 가장 높은 선수에게 시상하고 있다.

1958년 1회 수상자는 김동주(경남고)였다. ‘4할 타자’ 백인천(경동고), 전 LG 감독 이광환(중앙고)이 뒤를 이었고, 1973년 ‘대도’ 김일권(군산상고), 77년 이만수(대구상고)가 프로야구 스타로 성장했다.

이후 수상자들은 김건우(80년·선린상고), 강혁(91년·신일고)처럼 불의의 부상·사고를 당하거나 프로에서 일찍 시드는 경우가 많았다. ‘이영민 타격상의 저주’라는 말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전문가들은 “규정타석 수(60타석)가 너무 적어 변별력을 갖기 힘들고, 고교 최고 타자도 프로에 와서 성공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라며 ‘이영민 타격상=프로 선수로 성공’ 등식은 맞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후 ‘소년장사’ 최정(2004·유신고), ‘타격기계’ 김현수(2005년·신일고) 등이 나오며 상의 권위가 높아졌다.

지난해 수상자 배지환(경북고)은 메이저리그 피츠버그 구단에 입단했으나 한국에 있을 때 여자친구를 폭행한 사실이 드러나 귀국 조치돼 경찰 조사를 받았다.

정영재 스포츠선임기자 jerr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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