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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악당’ 잡는 일본 영웅 역도산 “조선인” 밝힌 뒤 의문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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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3호 22면

[스포츠 다큐-죽은 철인의 사회] 프로레슬링의 전설

역도산이 팔꺾기 기술로 미국 선수를 공격 하고 있다. 일본인들은 ‘미국’을 혼내주는 역도산에게 환호했다. [중앙포토]

역도산이 팔꺾기 기술로 미국 선수를 공격 하고 있다. 일본인들은 ‘미국’을 혼내주는 역도산에게 환호했다. [중앙포토]

力道山. 이 한자를 일본인은 ‘리키도잔’이라고 읽고, 남북한에선 각각 역도산과 력도산이라고 달리 읽는다. 이 고유명사를 읽을 때 동북아 3국 국민이 떠올리는 정서와 느낌은 다르다. 일본의 사회학자 이타가키 류타는 논문 ‘동아시아 기억의 장소로서 力道山’(역사비평 2011년 5월호)에서 ‘역도산이라는 인물에는 일본인·조선인·한국인으로서의 국민성 또는 민족성이 부여되고 투영되었다’는 논지를 펼친다. 각기 다른 발음으로 불리는 역도산 안에 일본의 식민지배, 미국에 대한 일본인의 감정, 민족차별, 태평양전쟁, 냉전과 탈냉전의 동아시아 역사가 얽혀 있다는 것이다.

당수로 미국 샤프 형제 쓰러뜨려 #일본 “천황 다음에 역도산” 열광 #함경남도 출신 … 북한선 ‘열사’ 칭호 #큰돈 번 뒤 63년 방한 “조국 돕겠다” #술집 시비 끝 야쿠자 칼 맞은 뒤 숨져 #이노키 “산부인과 수술, 치료 잘못돼”

김신락(金信洛·역도산의 본명)은 1924년 함경남도 홍원군에서 태어났다. 타고난 씨름꾼이었던 그는 요코즈나를 꿈꾸며 일본으로 건너가 스모계에 뛰어든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질시와 차별에 시달리다 스모 선수의 상징인 존마게(일본식 상투)를 스스로 잘라버린다. 당시 일본에서 태동기였던 프로레슬링에 투신한 역도산은 하와이에서 1년간 수련한 뒤 귀환한다.

패전 시름 깊었던 일본인들 대리만족

도쿄 남쪽 사찰 혼몬지에 있는 역도산의 묘소에는 그의 청동상이 세워져 있다. [정영재 기자]

도쿄 남쪽 사찰 혼몬지에 있는 역도산의 묘소에는 그의 청동상이 세워져 있다. [정영재 기자]

역도산이 일본의 영웅으로 떠오른 건 1954년 2월 샤프 형제와의 대전이었다. 스모 출신인 역도산과 유도 선수 출신인 기무라 마사히코가 팀을 이뤘다. ‘일본인 몸통만 한 허벅지, 식빵을 집어넣은 듯한 팔 근육에 가슴과 배에도 텁수룩한 털이 난’ 괴물로 묘사된 샤프 형제는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을 때려잡은 미국인의 전형이었다. 역도산은 스모 기술에서 원용한 가라테 촙(일본식 당수)을 휘둘러 이들을 무릎 꿇렸다. 일본인들은 환호했고,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쇼맨’이 만든 완벽한 대리만족이었다. 역도산은 이후 반칙을 일삼는 미국 악당을 응징하는 정의의 주먹이 됐다. 역도산의 경기는 당시 막 보급된 흑백 TV로 방영돼 일본인들의 절대적인 인기를 얻었다. “천황 다음에 역도산”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미국을 응징하는 일본 영웅’ 캐릭터인 역도산이 조선인이어서는 안 됐다. 역도산은 철저히 일본인으로 행세했다. 출생지는 나가사키로 바뀌었고, 가계(家系)와 소학교 시절 영웅담도 꾸며졌다.

하지만 스모계와 재일조선인 사이에서는 역도산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고 한다. 영화 <역도산>에는 고향 친구 식당에 역도산이 밤에 몰래 찾아와 불고기를 먹고 가는 장면이 나온다.

일본 프로레슬링계를 평정하고 사업 성공으로 거부가 된 역도산은 드디어 ‘커밍 아웃’을 한다. 1963년 1월 8일 전격 방한을 한 것이다. 박정희 ‘혁명정부’가 급히 진행하던 한·일 국교정상화 협상에 역도산이 모종의 역할을 맡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역도산은 기자회견에서 “20년 만에 모국을 방문하게 되어 감개무량합니다. 긴 시간 일본어만 사용했기에 한국어는 전혀 못합니다”고 말한다. 사석에서는 한·일 국교정상화 핵심 이슈였던 ‘대일 청구권 금액’과 관련해 “만약 일본이 청구권 액수를 깎는다면 이케다 총리를 이 주먹으로 갈길 용의가 있다”고 농담을 했다고도 한다.

“대일 청구권 액수 깎으면 주먹 갈길 것” 농담

2006년 2월 일본에서 만난 역도산의 부인 다나카 게이코, 박치기왕 김일, 안토니오 이노키. [정영재 기자]

2006년 2월 일본에서 만난 역도산의 부인 다나카 게이코, 박치기왕 김일, 안토니오 이노키. [정영재 기자]

북한에서 ‘력도산’에 대한 존경과 대접은 상상 이상이다. 북한에서 역도산이 알려지게 된 것은 1960년대 재일동포 북송 사업으로 북한에 간 사람들의 구전(口傳)과 이들이 가져간 영화 등을 통해서였다. 김일성 주석은 ‘미제’를 혼내주고 ‘일제’에도 조선민족의 혼을 담은 된주먹을 휘두른 역도산을 높이 평가한다며 ‘렬사증(烈士證)’을 수여한다. 역도산은 김일성의 생일에 벤츠를 선물하고, 1964년 도쿄올림픽 때 북한 선수단의 체류 경비를 대겠다고도 했다.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드러낸 1963년 겨울, 역도산은 의문에 쌓인 죽음을 맞는다. 역도산은 도쿄 아카사카의 나이트클럽에서 야쿠자 소속원과 시비 끝에 칼을 맞는다. 다행히 상처가 깊지 않아 수술은 잘 끝났으나 복막염으로 2차 수술 후 숨을 거둔다.

이노키 “가스 나오기 전 음료 마신 게 치명적”

역도산의 문하생 중 두각을 나타낸 레슬러는 안토니오 이노키·김일·자이언트 바바 등이었다. 특히 은퇴 후 정치인으로 변신한 이노키는 스승에 대한 존경심이 남달라 북한에 32번이나 갔다 왔고 북한 정·관계 인사들과 친분을 쌓았다. 그가 주도해 만든 이벤트가 1989년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이다. 당시 한국외국어대생 임수경이 참가해 김일성 주석을 만났다.

지난 6월 도쿄 참의원 의원회관에서 이노키 의원을 만나 역도산의 죽음에 대해 궁금한 점을 물었다. 그는 “스승님은 술버릇이 좋은 편이 아니어서 자주 시비가 붙곤 했다. 그날도 화장실에 가면서 어깨가 부딪친 야쿠자를 때리면서 사건이 벌어졌다. 깔아뭉개고 때리는 과정에서 야쿠자가 빼든 칼에 가볍게 찔렸고, 상처가 깊지 않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고 한다”고 말했다.

이노키 의원에 따르면 역도산은 워낙 힘이 좋아 조금만 움직여도 상처를 꿰맨 부분이 터져버려 다리를 붙잡고 있지 않으면 안 됐다고 한다. 역도산의 죽음에 대해 아직도 많은 의혹과 음모론이 나돈다고 하자 그가 말했다. “칼을 맞은 다음날 입원한 병원이 산부인과여서 외과적인 조치가 미흡했다. 혈압이 떨어졌을 때 쓰는 약조차 없었다. 또 수술 뒤 가스가 대장을 지나 몸 밖으로 배출돼야 하는데 그 전에 녹차인지 주스인지를 마신 게 결정적인 사인이었다고 한다. 그것을 누군가 마시게 했다는 얘기도 있다.”

이노키 의원을 만나기 전날, 도쿄 남쪽 혼몬지(本門寺)라는 절에 있는 역도산 묘소를 찾았다. 팔짱을 낀 역도산의 청동상이 버티고 있었다. 거기서 만난 일본인 노신사가 말했다. “리키도잔와 와래와래노 히-로”(역도산은 우리들의 영웅이었다.)

설경구 체중 28㎏ 불리고 일본어 완벽했지만 … 한·일 합작 영화 <역도산> 흥행 참패

영화 <역도산>

영화 <역도산>

2004년 송해성 감독이 연출한 영화 <역도산>(왼쪽 사진)이 개봉했다. 설경구가 역도산 역을 소화하기 위해 5개월 만에 체중을 28kg이나 불리고, 대사의 95%를 차지하는 일본어를 완벽하게 익혔다. 레슬링 경기 장면에서 설경구는 한 번도 특수장비나 대역을 쓰지 않고 역도산의 주특기인 가라테촙·헤드락·드롭킥 등을 해냈다.

<역도산>은 처음부터 일본 시장을 염두에 두고 한·일 합작 프로젝트로 기획됐다. <쉬리>, <공동경비구역 JSA>, <태극기 휘날리며>처럼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가 일본에서 성공했고, <역도산>은 일본인들의 영웅 이야기를 다뤘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더욱 승산이 있다고 봤다.

그러나 영화는 한국과 일본에서 흥행에 참패했다. 국내에서는 누적 관객 140만을 넘기지 못했다. ‘역도산은 보이지 않고 설경구만 보인다’ ‘뭔가 잔뜩 보여주려고 했지만 제대로 보여준 건 없는 영화’라는 평이 따랐다.

평론가들은 ‘한국인도 일본인도 아닌 역도산’을 그려내는 바람에 양국 모두에서 호응을 얻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또 하나의 흥행 참패 이유는 레슬러임과 동시에 쇼 비즈니스맨이었던 역도산의 일대기를 그려내자니 야쿠자·북한·우익 등 미묘한 사안들을 건드려야 했다는 거다. 역도산이 죽은 지 40년이 넘었어도 일본 사회에서 이들은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역도산을 찌른 야쿠자도 당시에는 살아 있었다. 이들을 의식하다 보니 리얼리티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정영재 스포츠선임기자 jerr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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