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보스턴 영웅 서윤복, 개한테 쫓기고 신발끈 풀려도 세계신

중앙선데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582호 22면

[스포츠 다큐 - 죽은 철인의 사회] 마라톤 전설의 계보

2001년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는 서윤복 선생. [중앙포토]

2001년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는 서윤복 선생. [중앙포토]

‘학교가 끝나면 금호동 산넘어 장충체육관 앞 동대문까지 걸어온다. 동대문에서 옷을 벗어 빽 속에 넣고 영천행 전차운전사에게 영천까지 가져다 달라고 맡기고 전차따라 연습한다. 영천에서 옷을 받아 옆에 끼고 무악재 고개 넘어 집까지 달려온다. 이것이 나의 연습이었다’ (서윤복 수기 『나의 마라톤』 중)

1947년 보스턴마라톤 제패 서윤복 #동대문 ~ 서대문 전차 따라 뛰어 #“기계에 없는 초능력 원천은 정신력” #2001년 케냐 11연패 저지한 이봉주 #“서 선생님처럼 막판 언덕서 스퍼트 #시켜서 하는 연습으로는 1등 못해”

지난해 6월 27일 타계한 서윤복 선생(1923∼2017)은 손기정이라는 큰 산에 가려진 한국 마라톤의 거봉이었다. 그는 1947년 제51회 보스턴마라톤에서 2시간25분39초의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동양 선수로서 첫 우승을 차지했다. 광복 직후 궁핍과 어수선함 속에 새 나라를 만들 희망에 부풀어 있던 우리 국민에게 서윤복의 보스턴 쾌거는 큰 용기를 줬다. 서윤복 선생은 2013년에 손기정·김성집(역도)에 이어 세 번째 ‘대한민국 스포츠 영웅’에 선정됐다.

서울 은평구 녹번동에서 나고 자란 서윤복은 일찍 부친을 여의고 철공소·인쇄소 등에서 견습공으로 일하며 경성상업실천학교(현 숭문고) 야간부에서 학업을 병행했다. 달리기에 소질을 보인 서윤복은 소학교 운동장에 뿌려진 ‘1936년 백림(베를린) 올림픽 손기정 1등, 남승룡 3등’ 호외를 보고 ‘마라톤왕자’의 꿈을 키웠다. 그러나 가난한 고학생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주경야독으로 파김치가 된 몸으로 동대문에서 서대문 영천까지 전차를 따라 달리는 것뿐이었다.

국립체육박물관추진단에서 보존 중인 서윤복 선생의 보스턴마라톤 우승 메달과 자신의 보스턴 완주 메달을 비교 설명하고 있는 이봉주 이사. [오종택 기자]

국립체육박물관추진단에서 보존 중인 서윤복 선생의 보스턴마라톤 우승 메달과 자신의 보스턴 완주 메달을 비교 설명하고 있는 이봉주 이사. [오종택 기자]

1946년 손기정·남승룡 등이 우수선수 발굴·육성을 목표로 조선마라손보급회를 결성했다. 서윤복은 손기정 선생의 눈에 들어 돈암동 손 선생 자택에서 숙식하며 체계적인 훈련을 받게 된다. 손기정은 아침마다 장을 봐 부인과 함께 음식을 만들어 선수들을 뒷바라지했다. 그가 가장 많이 먹인 건 통닭과 새우젓이었다. 단백질과 염분 보충을 위한 것이었으니 나름대로 과학적인 식단이었다. 1년 뒤 ‘감독 손기정, 코치 겸 선수 남승룡, 선수 서윤복’으로 구성된 보스턴 정복대는 생각지도 않은 대박을 터뜨리게 된다.

보스턴마라톤은 우리나라와 인연이 깊다. 47년 서윤복에 이어 50년에는 함기용-송길윤-최윤칠이 1,2,3위를 휩쓸었다. 2001년 ‘국민 마라토너’ 이봉주가 1위로 골인하며 케냐 선수들의 대회 11연패를 저지했다.

최근 서윤복 선생의 유족은 국립체육박물관추진단에 유물 31점을 기증했다. 보스턴마라톤 우승 메달과 행운의 열쇠, 사진첩 등이 포함돼 있다. ‘보스턴 영웅’의 맥을 이은 이봉주 대한육상경기연맹 홍보이사를 그 자리에 초대했다.

우승하고도 배 타고 18일 만에 귀국

서윤복의 1947년 보스턴마라톤 우승 순간. [중앙포토]

서윤복의 1947년 보스턴마라톤 우승 순간. [중앙포토]

서윤복 선생이 받은 우승 메달은 두 개다. 하나는 훈장 모양으로 옷깃에 꽂을 수 있게 만든 것으로, 가운데 조그만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다. 조금 더 큰 메달은 뒷면에 서윤복의 영문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봉주 이사는 “저는 우승 트로피와 크리스털 화병, 완주 기념 메달을 받았어요. 우승 상금도 10만 달러 받았죠”라며 서 선생의 우승 메달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서윤복 일행은 미 군용기로 닷새 걸려 거지 꼴로 보스턴에 도착했다. 현지 동포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지만 어처구니 없는 일도 겪었다. 체육사학자 손환 교수(중앙대)는 “한 교포가 고급 식당에 선수단과 손님들을 초대해 거창한 만찬을 베푼 뒤 외상값을 안 갚고 잠적해 버렸어요. 선수단은 돌아올 비행기 삯을 식당에 주고 우여곡절 끝에 화물선을 얻어 타고 18일 만에 귀국하게 됐죠” 라고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레이스 도중엔 아찔한 순간도 많았다. 갑자기 코스로 뛰어든 개를 피하던 서윤복이 넘어져 무릎을 다쳤고, 막판엔 신발 끈이 풀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서윤복은 32㎞ 지점부터 시작되는 상심의 언덕(heartbreak hill)에서 스퍼트, 선두로 치고 나갔다. 2위 미코 피타넨(핀란드)보다 4분이나 빨랐던 압도적 레이스였다.

보스턴에서 한국 선수들이 유독 좋은 성적을 낸 이유가 뭘까. 이봉주 이사는 “저는 오르막을 좋아해 레이스 막판에 언덕이 나오는 코스에서 성적이 좋았어요. 선배들도 한국 선수 특유의 정신력과 지구력을 바탕으로 상심의 언덕에서 강력한 힘을 낸 게 아닐까요”라고 반문했다.

“고비 못 넘는 후배들 ‘빠따’ 치고 싶지만 … ”

보스턴마라톤 우승 뒤 귀국길에 도쿄에 들른 손기정 감독(왼쪽), 서윤복, 남승룡 코치. [중앙포토]

보스턴마라톤 우승 뒤 귀국길에 도쿄에 들른 손기정 감독(왼쪽), 서윤복, 남승룡 코치. [중앙포토]

서윤복과 이봉주는 닮은 점이 많다. 둘 다 체격이 왜소했다. 서윤복은 1m60cm, 이봉주는 1m66cm다. 마라톤에 가장 중요한 게 정신력과 훈련량이라고 믿는 것도 같다. 서윤복 선생은 한 잡지에 ‘기계의 능력은 한도가 있다. 인간의 능력은 무한대한 초능력을 가졌다고 했다. 그 초능력의 원천은 무엇인가. 정신력이라고 한다’고 썼다.

이봉주는 마라톤 선수로서 치명적 약점인 평발을 극복했고, 안으로 말린 눈썹이 눈을 찌르는 고통을 삼켜가며 42.195㎞ 풀코스를 41차례나 완주했다. 이봉주 이사는 “저는 올림픽 금메달이라는 확고한 목표가 있었어요. 죽을 만큼 힘들 땐 목표를 상기하고, 부모님을 생각했죠. 저는 스피드가 떨어지는 편이라서 훈련 끝나고 남들 다 잘 때 일어나 스피드 훈련을 한 적도 많아요”라고 회고했다.

손기정-남승룡-서윤복 등 마라톤 영웅들이 차례로 세상을 떴다. 그 사이 한국 마라톤은 침체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이봉주가 2000년에 세운 한국최고기록(2시간7분20초)은 18년째 깨지지 않고 있다.

육상연맹 기술위원장을 맡고 있는 이봉주 이사가 한숨을 쉬었다. “후배들은 체격도, 기술도 좋아졌고, 외국인 코치의 선진 트레이닝도 받고 있어요. 하지만 마라톤은 누가 시켜서 하는 정도의 연습량으로는 이길 수 없어요. 고비를 넘지 못하고 현실에 안주하는 후배들 보면 빠따 한 대씩 치고 싶지만 요즘 그랬다간 큰일 나겠죠. 하하. 후배들이 뚜렷한 목표와 사명감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122회 맞은 보스턴마라톤 올해 우승자는 일본 공무원

보스턴마라톤은 근대 올림픽 다음으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국제 스포츠 이벤트다. 1896년 그리스 아테네에서 열린 제1회 근대 올림픽 이듬해인 1897년에 첫 대회가 열렸다. 런던·로테르담·뉴욕 마라톤과 함께 세계 4대 마라톤 대회로 불리는 보스턴마라톤은 1,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딱 두 차례(1918년, 1949년) 중단됐다. 매년 4월 셋째 월요일인 애국자의 날(Patriots’ Day)에 보스턴 교외 홉킨턴을 출발해 보스턴 시내의 보스턴 육상경기 클럽 앞에 골인하는 편도 코스에서 열린다. 1996년 100회 대회에는 3만8700명이 참가해 세계 최대 국제 마라톤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대회가 너무 비대해지자 1997년부터 참가자 수를 1만5000명으로 제한하고 있다. 1972년부터 여성 참가를 허용했다.

보스턴마라톤은 경기가 열리는 구간 어디서나 열광적인 응원이 펼쳐진다. 20㎞ 구간에서는 인근 웨슬리여대 학생들이 ‘kiss me’라고 쓴 팻말을 들고 러너들에게 대시하기도 한다. 달리기 좀 한다는 사람에겐 보스턴마라톤 출전이 ‘버킷리스트 1번’이다. 2013년 대회 때는 결승지점 부근에서 폭탄 테러가 일어나 3명이 사망하고 180여 명이 다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올해 122회 대회는 일본의 가와우치 유지가 우승했다. 그는 직업 선수가 아니라 도쿄 인근 사이타마현청 소속 공무원이라는 사실이 알려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정영재 스포츠선임기자 jerry@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