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하위직은 자체 숙정하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고위 공무원에 이어 제2단계로 4급(서기관-기정)이하 공무원에 대한 부처별 숙정이 계속됐다.
국보위는 고위 공무원 숙정에 「시범」을 보였으니 나머지 하위직에 대해서는 각부처가 알아서 하라고 지시했다.
사상 유례 없는 무시무시한 숙정을 직접 체험한 남은 고위직 공무원들은 얼마를 어떻게 갈라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해 갈팡질팡했다. 많이 갈라 좋은 것이 아니지만 적당히 몇 명만 자르고 넘어갈 분위기도 아니어서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도마 위에 올려진 하위직공무원들의 동요는 말할 나위 없었다.
특히 경고나 견책정도의 경미한 징계라도 받은 적이 있는 공무원들은 불안·초조 속에 전전긍긍해야했다.
관가가 이처럼 긴장과 불안에 휩싸여 있던 7월9일 오자복 국보위문공위원장(소장·현 국방장관)이 고위공직자 숙정결과를 발표했다.
발표가 예정보다 늦어진 것은 숙정 고위공직자의 사표를 받는 과정이 필요했고 일부는 잘못이 없다고 반발하면서 사표제출을 거부해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발표과정에서 소위 실세가 무엇인가를 재확인시키는 촌극이 벌어졌다.
『상당수는 체념하고 순순히 물러났지만 몇몇은 이렇게 물러나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버티었습니다. 장관들도 그 구체적인 이유를 모르니까 결국 국보위가 설명을 해줘야 했습니다. 국보위에 와서 따지는 이들에게 근거 자료를 제시하면 이내 수긍했습니다. 국보위로서는 확실한 자료들을 확보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대상자가 확정되고 발표문안을 작성할 때입니다. 사회정화분과위의 허삼수 대령이 중심이 돼 문안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을 국보위 홍보팀이 대 국민용으로는 표현이 적합하지 않다며 뜯어 고쳤습니다. 주요사항 발표는 국보위대변인격인 문공분과위원장이 맡게 돼있었으니까요. 허 대령은 일을 직접 해온 관계자들이 제일 잘 아는 법인데 왜 뭔지 모르는 사람이 멋대로 문안을 바꾸느냐고 호통을 쳤습니다.
정화위가 만든 문안 수정은 윤기병 공보실장(현 청와대 공보비서관)등이 했겠지만 문공위원장이 욕을 본 겁니다. 그래서 당초 사정분위가 작성한 원안대로 발표문이 나오게 됐지요. 』국보위 관계자들의 얘기다.
국보위 관계자들은 최소한 수년 내에는 공무원 부정이나 비위가 발붙일 수 없는 풍토가 조성됐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따라서 자체숙정이 미흡하면 국보위가 직접 개입할 것이라는 엄포를 각부처장에게 거듭했다. 징계를 받았던 공무원이 일단 대상으로 지목됐다. 그러나 징계사유가 너무 미미해 옷을 벗기기에는 가혹하다 싶은 대상이 많거나 「기본 양」은 채워야할 형편에 있던 부처는 갖가지방안을 짜냈다.
검찰은 74년이래 진정서나 투서를 받았던 수사관이나 입회서기를 집중 조사해 25명의 사표를 받았다.
체신부는 지방체신청 등 외청의 고령 공무원 10명의 사표를 받았고 문교부는 여러 차례 경고처분을 받았거나 고령·병약한 자를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다보니 본부직원들 가운데는 해당자가 없었다.
어차피 누군가는 나가줘야 할 상황에서 지방과 외청은 그만큼 불리할 수밖에 없었고 고령·병약도 「죄」가 돼야했다.
부처에 따라서는 얼마 안 있으면 정년퇴직할 사람을 먼저 골랐고 그래도 「기본 양」이 차지 않자 이번에는 나가서 다른 직장을 찾기에 수월한 전직이 가능한 젊은 사람이 낫지 않느냐는 것이 이유로 등장했다.
사법서사 개업이 가능한 7년 이상 근무자를 대상으로 사표를 받은 법원은 그런 면에서 일종의 절충형태였다.
이밖에 부양책임이 덜한 여직원이 십자가를 지는 경우도 있었고, 국보위로부터 함량미달이란 호령이 떨어지자 다급해진 나머지 대상자를 과별 투표로 결정한 부처도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묘안백출은 재조사지시가 떨어진 얼마 뒤의 일이었고 초기단계에는 징계 유경험자 등을 중심으로 대상자 선정이 이뤄졌다.
고위 공무원 숙정발표 다음날인 7월10일, 국무총리실은 6명의 하위직 숙정자를 확정했다. 여기에는 부이사관급 2명도 포함됐다.
사실 고위직 숙정작업이 시작되면서 국보위는 하위직에 대해서도 내막적으로 대상자 선정작업을 벌여왔고 부처에 따라서는 대상자를 잠정적으로 점찍어 둔 데도 있었다. 다만 범위·방법을 몰라 눈치를 살피고 있던 터였다.
총리실의 숙정소식이 알려지자 각 부처는 이를 기준 삼아 어림짐작으로 대상자들의 사표를 받기 시작했다.
11일 경제기획원은 서기관4명·사무관6명을, 재무부는 서기관2명·사무관2명·주사1명을, 조달청은 서기관·사무관 각3명과 주사 10명 등 16명을, 전매청은 서기관4명·사무관2명 등을 확정, 본인들에게 통보를 끝냈다.
업무의 특수성 때문에 고위직 때도 곤욕을 치른 관세청은 서기관6명·사무관10명·주사 및 주사보63명 등 79명의 사표를 받았고 역시 혼쭐이났던 내무부에서는 2백81명(시·도 포함)의 서기관 중 30여명이 「생사」를 모른 채 밤늦게까지 시달리고 있었다.
이밖에 보사부는 20명, 노동청에서는 30명 정도가 숙정대상자로 결정됐다.
국보위의 불같은 독촉 속에 진행된 부처별 자체숙정은 12일 거의 마무리돼 사회정화분과위에 속속 보고됐다.
그러나 사정분위의 첫 반응은 각 부처를 다시 한번 오들오들 떨게 했다. 『이쯤 했으면…』하고 국보위에 갔던 각 부처 감사관들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다』는 날벼락을 맞고 쫓겨나야 했다.
그간의 부처별 숙정추이를 예의 주시하던 정화위는 부처간의 담합식 숫자 채우기에 적이 불쾌해 있었고 사명감 없는 숙정태도를 질타했다.
혼비백산해 국보위를 나온 관계자들은 부랴부랴 늘리기 작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위나 사안이 경미하다하여 제외됐던 공무원들이 다시 포함됐다.
서기관6명·사무관10명 등 79명을 내보내겠다고 보고했던 관세청은 서기관12명·사무관21명을 포함, 2배 가까운 1백51명으로 대상자를 늘리느라 안간힘을 썼다.
원안대로 받아들여진 부처는 부이사관2명·서기관3명·사무관1명을 숙정한 총리실뿐이었고 이임식도 없이 장관을 떠나 보내야했던 상공부는 서기관5명·주사1명을 추가하는 선에서 양해를 받았다.
이렇게 하여 4건7백60명의 하위직 공무원이 80년 여름 직장을 잃고 말았다.
당시 숙정을 주도한 허삼수 대령은 한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너무 급하게 추진하다보니 말단에서 부작용도 있었고 억울한 희생자도 있었다. 그러나 사회정화의 방향이라는 큰 흐름은 잡았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바 있고 김만기 당시 사회정화분과위원장은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공인으로서 한 일이다. 그때 누가 무슨 잘못을 했고를 따지는 것은 바람직스럽지 않다고 본다』고 말하고 있다. <특별취재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