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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논설위원이 간다

살생부 나도는 지방도시 … ‘압축도시’가 탈출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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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서경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서경호의 이슈 현장

15일 경기도 동두천시 생연동 외국인 관광특구. 한때 주한 미군과 외국인 노동자, 이국적인 분위기를 찾는 한국인들로 북적대던 시절이 있었지만 요즘은 눈에 띄게 한산하다. 주둔하는 미군이 줄어든 데다 대중교통이 좋아져 용산과 이태원으로 유흥인구가 빠져나가는 빨대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동두천시가 예산을 지원해 빈 점포에 공방을 열었지만 거리를 살리기엔 역부족이다. [변선구 기자]

15일 경기도 동두천시 생연동 외국인 관광특구. 한때 주한 미군과 외국인 노동자, 이국적인 분위기를 찾는 한국인들로 북적대던 시절이 있었지만 요즘은 눈에 띄게 한산하다. 주둔하는 미군이 줄어든 데다 대중교통이 좋아져 용산과 이태원으로 유흥인구가 빠져나가는 빨대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동두천시가 예산을 지원해 빈 점포에 공방을 열었지만 거리를 살리기엔 역부족이다. [변선구 기자]

헌법 1조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에 동의하지 않는 국민은 별로 없을 것이다. 지방 분권 강화도 마찬가지다. 문재인 정부의 국정 운용 5개년 계획에 ‘지방재정 자립을 위한 강력한 재정분권’이 포함돼 있고, 이에 대한 학계와 전문가의 공감대도 크다. 모두 지방분권 강화를 얘기할 때 “하지만 그게 아닐 수도 있다”고 하면 용의 비늘을 거스르는 역린(逆鱗)이 될 수도 있겠다. 문재인 대통령은 연방제 수준의 지방 분권 강화를 여러 차례 공언했다. 지방자치 확대가 오히려 지방을 죽일 수도 있다는 한 학자의 주장을 들여다봤다.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돈키호테의 만용일지, 아니면 벌거벗은 임금님의 진실을 밝히는 진정한 용기인지는 독자의 판단에 맡긴다.

인구는 절반으로 줄고 재정은 악화 #20년 뒤 지방도시 30% 사실상 파산 #균형발전은 평등주의가 낳은 산물 #재정분권으로도 도시 쇠퇴 못 막아 #도시 외곽 개발로 원도심 더 힘들어 #무분별한 지방선거 공약 경계해야

15일 오후 2시 경기도 동두천시 생연동 외국인 관광특구. 주변에 주한 미군 2사단 캠프 케이시 등 미군 부대가 몰려 있어 한때 ‘기지촌’으로 불렸던 곳이다. 평일 낮이어서 외국인이 찾는 클럽은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지나가는 상인은 “밤이 되면 네온사인이 환하게 켜지지만 손님은 별로 없다”며 “전기 값이 아까울 정도”라고 했다. 문을 연 양복점에 들어갔지만 손님은 없었다. 사장은 “요즘 매출은 한창 때의 10분의 1도 안 된다”며 “한때 40여 곳에 달했던 이 지역 양복점이 지금은 10개 정도밖에 안 남았다”고 말했다. 주변 미군 부대의 규모가 줄어든 탓이다. 한때 2만 명이 넘었던 동두천 주둔 미군은 2004년 즈음 이라크 파병 등으로 떠나면서 지금은 4분의 1수준으로 줄었다. 도시 면적의 43%가 미군에 공여될 정도로 미군에 절대적으로 의지하던 지역 경제는 쪼그라들었다. 도심에 있는 중앙시장 근처도 활기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중앙로에서 중앙시장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연이어 있는 4개 점포에 ‘임대 문의’가 붙어 있었다. 2020년 이후 캠프 케이시 부지가 반환되면 본격적인 개발이 이뤄질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지만 현재로선 쇠퇴의 징후가 농후한 중소도시다.

마강래 교수

마강래 교수

동두천시는 마강래(47) 중앙대 도시계획부동산학과 교수가 지난해 발간한 『지방도시 살생부』에서 쇠퇴도시의 하나로 꼽은 곳이다. 동두천뿐만 아니라 조선업 불황으로 직격탄을 맞은 거제시, 석탄산업 사양화로 성장동력을 잃은 태백시·문경시·삼척시·정선군, 교통망의 변화로 쇠퇴한 나주시·남원시 사례도 나온다. 도시 쇠퇴를 부른 원인은 다양하지만 근본 원인을 따지면 일자리가 없어져 인구가 줄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쇠퇴도시가 이곳뿐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마 교수는 저출산·고령화·저성장 탓에 2040년이 되면 전국 지방자치단체 중 30%는 도시 기능을 상실할 것으로 분석했다. 그 중 절대다수인 96%가 지방 중소도시다. 지방자치가 본격화한 1995년에 비해 인구가 절반으로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도시 인구가 줄면 공공서비스 효율이 나빠진다. 인구가 절반으로 줄었다고 도로나 상·하수도 등 공공서비스를 절반으로 줄일 수는 없다. 인구가 줄어 지방 세수는 쪼그라드는데 공공서비스는 유지해야 하니 재정은 악화하고 공공서비스 품질은 떨어진다. 결국 중앙정부의 지원 없이 독자 생존이 불가능한 지방 중소도시는 사실산 ‘파산’ 상태가 되고 정부 예산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될 것이라는 게 마 교수 분석의 골자다. 어떤 해법이 있을까. 15일 중앙대 마 교수 연구실을 찾았다.

책 제목이 무시무시하다.
“원래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였는데 출판사 조언을 받아들였다.”
출간 이후 언론 칼럼 등에 인용되는 등 주목 받았다. 전문가 그룹 반응은 어땠나.
“모두 알고는 있지만 차마 하기 힘든 얘기를 했다며 고맙다는 인사가 많았다.”
지방분권이나 균형발전이라는 말 자체에 반대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수도권·지방 간의 차별 없는 균형발전은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다. 명분상으로도, 도의적으로도 옳다. 우리 사회의 극심한 평등주의가 낳은 산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실적인 답은 아니다. 인구 유출과 일자리 축소로 점점 쇠락해가는 지방 중소도시를 모두 살리려다가는 우리 모두 공멸의 늪에 빠질 것이다. 지금의 분권 논의는 너무 조급하다. 앞뒤를 재고 숙고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균형발전보다 주민 삶의 질을 높이는 게 중요하다.”
지방도시들은 인구를 늘리려 애쓴다.
“현재 지방도시들이 내놓은 도시기본계획상 계획인구를 다 합치면 10년 후 우리나라 인구가 6400만 명이나 된다. 이런 식의 비현실적인 성장과 팽창 전략은 우리 모두를 죽이는 길일 뿐이다.”
해법은 뭔가.
“흩어져 있는 인구를 모으고 공공시설과 서비스를 집중하는 ‘압축도시’가 살 길이다. 지방도시 모두를 살릴 수는 없다. 키울 곳과 압축시킬 곳을 선별해야 한다.”
마을에 농로 하나를 내는데도 재산권을 둘러싸고 주민 이해가 엇갈린다. 하물며 도시의 공공시설을 집중하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소외되는 지역에서 표가 나올 수 없으니 국회가 적극적으로 나설 것 같지 않다.
“정치적 수용성(受容性)을 높이는 방법을 고민 중이다. 지자체 여럿을 광역권으로 묶고, 이들이 스스로 협력해 거점을 결정하도록 하는 방안이 있을 수 있다. 광역시급의 대도시가 거점이 되고 주변 중소도시와 농어촌과 연계해 상생발전하는 식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권한을 이양하고 충분한 유인장치를 마련하는 중앙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 대도시권을 경쟁단위로 파악한 이명박 정부의 ‘5+2 광역경제권’이나 도시 간 협력과 연계를 중요시한 박근혜 정부의 지역생활행복권이 비록 성과를 내지는 못했지만 시도는 좋았다. 정부가 바뀌었다고 무조건 적폐로 치부해선 안 된다.”
정부가 재정분권을 위해 현재 8:2인 국세-지방세 비율을 7:3을 거쳐 장기적으로 6:4수준까지 지방세 비율을 높일 계획이다.
“재정자립도가 낮기 때문에 지방에 재정 권한을 대폭 이양해야 한다는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일본의 국세-지방세 비율은 5.5: 4.5이지만 영국은 9:1이다. 지방세 비중을 높이는 게 도시의 쇠퇴를 막는 방법인가. 무너지는 지방도시에 과세 자주권이 그리 중요하겠나. 중앙정부가 돈줄을 쥐고 있어야 광역단위의 행정구역 개편 등을 할 수 있다.”

제 밥그릇이 중요해 선거제도 개편에 미온적인 정치권이 지방도시 살리는 광역화와 압축도시에 나설 수 있을까.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마 교수에게 그럼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뭐냐고 물었다. 그는 지방도시의 원도심을 황폐화시키는 도시 외곽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 개발부터 막아야 한다고 했다. 안 그래도 인구가 줄어 도심이 비는 데 신도시까지 생기면 더 힘들어진다는 거다. 마 교수는 “도시 외곽이 개발되는 건 땅값이 싼 이유도 있지만 땅 소유주인 지역 토호와 건설업자의 결탁 때문인 경우가 많다”고 비판했다.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6·13 지방선거에서 무분별한 개발 공약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

서경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