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 제재 수위에 촉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대한항공이 집단소송 대상 기업 중 처음으로 과거 분식 사실을 밝혀 금융감독 당국의 처리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당국의 제재 수위에 따라 앞으로 기업들의 분식 고백이 잇따르거나 끊길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한항공은 "2003년 결산에서 재고 자산 중 719억원이 과대 계상된 것으로 확인돼 이 중 477억원을 지난해 사업보고서에서 '전기 오류수정 손실'로 처리했다. 나머지 242억원은 올 1분기 보고서에 반영할 계획"이라고 지난 20일 공시했다.

대한항공은 1978년부터 도입된 항공기 부품 중 일부가 이미 수리에 사용돼 재고가 남아있지 않은데도 회계에 반영되지 않아 발생한 문제라고 강조했다. 고의적으로 자산을 부풀린 게 아니고 단순한 재고관리 실수였다는 것이다. 회사 측은 이 같은 사실을 최근 금융감독원이 무작위로 선정해 진행하는 감리를 받던 중 회계 관련 자료를 재검토하다 발견했다고 설명했다.

최근 기아자동차 등이 회계기준을 잘못 적용하는 등의 단순 회계실수를 바로잡고 이를 공시한 적은 있으나 실제 존재하지 않는 자산이 회계에 반영돼 있었다는 사실을 회사 측이 스스로 밝힌 것은 대한항공이 처음이다.

◆ "제재 수위 낮을 것"=금감원은 현재 감리가 진행 중이라는 이유로 공식 입장을 내놓고 있지 않다. 하지만 회사 측이 잘못을 먼저 고백한 만큼 제재 수위는 높지 않을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분위기다.

금감원 관계자는 "과거 분식에 대한 집단소송 유예기간이 끝나는 내년 말까지 기업들이 최대한 과거 잘못을 고백하도록 유도함으로써 집단소송의 여지를 줄인다는 방침에 따라 대한항공에 대한 제재 수위가 낮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회사 측이 고의로 분식을 했을 경우 적용되는 검찰 고발이나 통보, 대표이사 또는 담당 임원 해임 권고 등의 중징계보다는 경고.주의 등 가벼운 제재가 취해질 가능성이 크다. 대한항공은 이번 사안과 관련해선 추후 집단소송을 당하지 않고, 기업외부감사법에 따른 과징금 부과 등 행정적인 제재도 면제받는다.

금융감독위원회 산하 증권선물위원회는 20일 관련 회사의 지분을 잘못 평가해 7290억원의 자기자본을 과대계상한 기아차에 대해 가장 가벼운 제재인 주의 조치를, 외부감사인인 하나안진회계법인에 대해서도 벌점과 담당 공인회계사에 대한 주의 조치를 각각 부과했었다. 이 같은 상황은 과거 분식회계를 한 다른 기업들엔 자기 고백을 수월하게 할 수 있는 요인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그러나 대한항공으로선 고의든 아니든 과거 분식이 드러남에 따라 기업 투명성에 대한 타격을 입게 됐다. 가능성은 낮지만 이번 분식이 고의로 이뤄진 것으로 밝혀질 경우 기업외부감사법에 따라 검찰 수사를 받을 여지도 배제할 수 없다.

나현철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