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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나라의 수도 예루살렘, 환호와 통곡이 엇갈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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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 전 이스라엘이 건국된 지난 14일은 팔레스타인 주민에겐 비극의 하루였다. 이날 이스라엘 주재 미국 대사관이 텔아비브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기면서 촉발된 대규모 시위에서 이스라엘 측이 발포해 팔레스타인 시위대 52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다쳤다고 미국의소리(VOA) 방송이 전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모두 수도로 주장하는 도시로,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6일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선언하고 미국대사관을 이전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스라엘 70년 <하> 팔레스타인 재앙 70년 #48년 팔 주민 70만 추방 #6일전쟁 뒤에도 수십만 #난민과 후손 최대 960만 #고향 귀환과 토지권 요구 #2국가체제 합의 실현 난망 #이, 분리장벽·과잉진압 지탄 #예루살렘 사태도 갈등 증폭 #국제사회, 공존의 지혜 절실

이스라엘 건국 70년을 맞은 14일 팔레스타인 국가 가자지구에서 주이스라엘 미국대사관의 예루살렘 이전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AFP=연합뉴스]

이스라엘 건국 70년을 맞은 14일 팔레스타인 국가 가자지구에서 주이스라엘 미국대사관의 예루살렘 이전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AFP=연합뉴스]

팔레스타인, ‘나크바(재앙의 날)’ 맞아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된 직후 서부 지중해 연안도시 하이파에서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시오니스트 무장대원의 강요 속에 추방되고 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당한 나크바(재앙의 날&#39;의 모습이다.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된 직후 서부 지중해 연안도시 하이파에서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시오니스트 무장대원의 강요 속에 추방되고 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당한 나크바(재앙의 날&#39;의 모습이다.

이번 사태로 팔레스타인은 더할 수 없는 분노와 슬픔에 또 다시 휩싸였다. 사실 5월 14일이 이스라엘인에게 건국기념일 축제의 날이라면 그 다음날인 15일은 팔레스타인인에게 통곡의 날이다. 이스라엘이 생기면서 고향 땅에서 밀려나게 된 팔레스타인인들은 이날을 나크바, 즉 ‘재앙의 날’로 부른다. 2000년 전 떠난 사람들이 다시 나타나 나라를 세우겠다고 하고, 강대국들이 그들에게 땅까지 떼어 주라고 하는 상황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이스라엘에 조상 대대로 살아온 국토의 절반을 잃은 것은 물론 제대로 된 독립국가도 건설하지도 못한 채 핍박 속에서 살고 있다. 팔레스타인의 비극은 현대 중동 정세 불안의 진앙지다.

48년 ‘엑소더스’ 나선 팔 실향민 70만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면서 거주지에서 쫓겨난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북부 갈리리 호수에서 시리아로 이동하고 있다. 복장으로 봐서 도시에 거주하던 기독교도 팔레스타인 주민으로 짐작된다. 이들은 난민촌을 거쳐 전 세계로 흩어져 &#39;팔레스타인 디아스포라&#39;시대를 열었다.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면서 거주지에서 쫓겨난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북부 갈리리 호수에서 시리아로 이동하고 있다. 복장으로 봐서 도시에 거주하던 기독교도 팔레스타인 주민으로 짐작된다. 이들은 난민촌을 거쳐 전 세계로 흩어져 &#39;팔레스타인 디아스포라&#39;시대를 열었다.

1947년 11월 유엔총회는 결의 181호로 당시 영국이 위임통치하고 있던 중동의 시스요르단 지역을 유대국가를 건설할 지역과 팔레스타인 국가를 세울 땅으로 분할하기로 했다. 시스요르단은 요르단 강에서 지중해 사이의 지역, 즉 지금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국가를 이루는 땅을 가리킨다. 이스라엘이 세워질 땅에서 70만 명의 아랍인, 즉 팔레스타인 주민은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졸지에 고향을 잃고 실향민이 됐다. 팔레스타인 엑소더스(대이동)다.

초기 팔레스타인 난민촌의 모습.

초기 팔레스타인 난민촌의 모습.

나크바는 구체적으로 1947년 12월 유엔총회의 결의안 통과부터 1948년의 1차 중동전쟁(이스라엘 독립전쟁) 이후 1949년 1월까지의 기간을 가리킨다. 정확한 숫자는 파악되지 않았지만  당시 이스라엘 몫으로 지정된 지역에 살던 팔레스타인 주민 약 70만 명이 고향을 떠나거나 추방된 것으로 추산된다. 이스라엘 몫의 영토는 영국 위임통치령이던 시스요르단의 절반에 해당한다.

시리아 다마스쿠스에 설치된 팔레스타인 난민촌의 모습. 고향을 잃고 천막 생활을 해야 했다.

시리아 다마스쿠스에 설치된 팔레스타인 난민촌의 모습. 고향을 잃고 천막 생활을 해야 했다.

팔레스타인 주민 80%가 고향에서 추방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독립 선언 이전에 이미 25만~30만 명의 팔레스타인 주민이 고향에서 쫓겨났다. 이스라엘의 군대 진입, 팔레스타인 마을 파괴, 시오니스트 민병대에 의한 주민 학살 공포 등 다양한 이유가 적용됐다. 이스라엘의 독립 선언으로 도시 거주 팔레스타인인은 거의 전부가 추방됐으며 농촌 지역에서도 유대인들이 400~600개의 마을을 점거하면서 대부분의 주민이 쫓겨났다. 이스라엘 몫의 땅에 거주하던 팔레스타인인의 약 80%가 고향을 잃은 것으로 추산된다. 부유층을 비롯한 일부 팔레스타인 주민만 이스라엘 영토가 된 고향에 남을 수 있었다.

서예루살렘 지역의 버려지고 무너진 옛 팔레스타인 농촌 마을. 이스라엘 건국 뒤 팔레스타인 농민들은 추방됐고 폐허가 된 마을 인근에 이스라엘인들의 키부츠(협동농장)가 들어섰다.

서예루살렘 지역의 버려지고 무너진 옛 팔레스타인 농촌 마을. 이스라엘 건국 뒤 팔레스타인 농민들은 추방됐고 폐허가 된 마을 인근에 이스라엘인들의 키부츠(협동농장)가 들어섰다.

이스라엘에 184만, 팔레스타인 국가에 455만

현재 기준 885만 이스라엘 인구의 20%정도를 차지하는 184만8000명의 아랍인이 잔류 주민의 후손이다. 여기에 더해 유엔 결의안에서 팔레스타인 몫으로 지정한 요르단강 서안지구와 가자지구, 동예루살렘 등 현재 팔레스타인 국가가 된 지역에 455만 명이 거주한다.

절망적인 표정의 팔레스타인 난민 가족.

절망적인 표정의 팔레스타인 난민 가족.

팔 출신 전 세계에 700만~960만

팔레스타인 엑소더스 사태는 1948년으로 그치지 않았다. 1967년 제3차 중동전쟁(6일전쟁)으로 이스라엘이 1947년 유엔 결의안에서 팔레스타인 몫으로 지정했던 요르단강 서안, 가자지구, 동예루살렘 등을 점령하자 이 지역에서 수십만 명에 이르는 팔레스타인 주민의 추가 탈출이 이어졌다.
팔레스타인 통계국 등은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팔레스타인 출신과 그 후손이 700만~96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다. 중동 국가에 가장 많이 거주하는데 이웃 요르단에 320만 명, 시리아에 63만 명, 레바논에 40만 명이 각각 몰려 산다. 일부는 아직도 난민촌 생활을 한다. 사우디아라비아에 28만 명, 이집트에 27만 명이 각각 거주한다. 중동 각 지역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인은 높은 교육열 덕분에 의사, 엔지니어 등 전문직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다.
오스만튀르크 시절 팔레스타인 기독교도들의 종교 이민으로 시작돼 1948년 추가 이주가 이뤄졌던 남미에도 팔레스타인 출신이 상당수다. 칠레에 50만 명, 온두라스에 25만 명, 과테말라에 20만 명이 각각 거주한다. 미국에도 25만 명이 살고 있다. 그야말로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이산의 슬픔이다.

팔레스타인 난민촌 학교. 그들은 난민촌에서도 교육을 그치지 않았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중동에서 가장 교육 수준이 높은 집단에 속한다. 교육은 팔레스타인의 미래 희망이다.

팔레스타인 난민촌 학교. 그들은 난민촌에서도 교육을 그치지 않았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중동에서 가장 교육 수준이 높은 집단에 속한다. 교육은 팔레스타인의 미래 희망이다.

난민들, 귀환과 토지 소유권 주장

실향민과 아랍 국가들은 팔레스타인의 귀환권리를 주장한다. 자신들이나 부모, 조부모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서 사는 권리는 물론 과거 소유했던 부동산의 권리도 주장한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고향을 떠난 팔레스타인 주민의 귀환을 금지하고 이들이 두고 간 땅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률을 줄줄이 마련했다. 만일 700만~960만 명의 팔레스타인인이 모두  귀향한다면 이스라엘은 인구 구조상 유대 국가로 존재하기 힘들고 아랍 국가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 문제는 현대사에게 가장 풀기 힘든 난제로 통한다.

64년 PLO 설립해 무장투쟁

팔레스타인은 1964년 팔레스타인 해방을 목표로 하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조직해 대이스라엘 투쟁에 나섰다. 야세르 아라파트가 의장에 올랐다. PLO는 여객기 납치와 1972년 뮌헨 올림픽 이스라엘 선수촌 기습과 선수 학살 등을 민간인을 대상으로 하는 무장 투쟁을 벌였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은 무론 미국과 서방진영은 PLO를 테러조직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1991년 11월 팔레스타인-이스라엘 평화협상을 위한 마드리드 컨퍼런스 이후 이스라엘과 서방 진영은 테러조직 지정을 해제했다. 1993년에는 유엔 안보리 결의 242호에 따라 PLO는 이스라엘의 존립권을 인정했으며 이스라엘은 결의 338호에 따라 PLO를 팔레스타인을 대표하는 유일기구로 받아들였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를 세운 야세르 아라파트(1929~2004년).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를 세운 야세르 아라파트(1929~2004년).

94년 ‘2국가 공존’ 오슬로합의

아라파트가 이끄는 PLO는 1988년 11월 15일 팔레스타인 독립을 선포해 100여 개 국가의 인정을 받았다. 1994년 9월 팔레스타인을 대표하는 PLO는 미국의 중재 아래 이스라엘과 협상해 ‘2국가 공존’을 골자로 한 오슬로합의를 이뤘다. 그 결과 그해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수립됐고 이는 2013년 정부 전환으로 이뤄졌다. 2012년에는 유엔총회에서 팔레스타인을 비회원 옵서서 국가로 받아들이는 내용의 결의안이 찬성 130표, 반대 9표, 기권 41표, 무효 5표로 통과됐다. 팔레스타인은 현재까지 전 세계 165개국의 승인을 받았지만 이스라엘은 물론 미국과 중 서방국가의 인정은 받지 못하고 있다. 한국도 미승인국이지만 팔레스타인 임시수도인 라말라에 연락사무소는 두고 있다. 팔레스타인 국가는 6020㎢의 면적에 455만의 인구가 거주한다. 마땅한 산업이 없어 1인당 국내총생산(GDP)가 2900달러 정도에 불과한 가난한 나라다.

팔, 내분으로 파타와 하마스가 분리 통치

팔레스타인은 정치적으로 이스라엘과 공존을 추구하는 아라파트의 파타(팔레스타인 민족해방운동)와 이스라엘을 인정하지 않는 급진주의 무장정파 하마스가 대립하고 있다. 현대 요르단강 서안은 파타가, 가자지구는 하마스가 분리 통치하는 상황이다. 그야말로 내우외환이다.

이스라엘, ‘현대판 게토’ 분리장벽 설치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의 요르단당 서안지구를 빙둘러 설치한 분리장벽. 이스라엘 측은 자폭 테러를 막기 위한 보안 장벽으로 부르지만 팔레스타인 측은 인종분리 장벽이라고 비난한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의 요르단당 서안지구를 빙둘러 설치한 분리장벽. 이스라엘 측은 자폭 테러를 막기 위한 보안 장벽으로 부르지만 팔레스타인 측은 인종분리 장벽이라고 비난한다.

1989년 팔레스타인의 지하드 단체를 비롯한 일부 과격 조직이 이스라엘 민간인을 상대로 하는 자폭 테러에 나섰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2000년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2차 인티파다(봉기)를 벌이는 동안 요르단강 서안지구 분리장벽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일부 팔레스타인 지역 주민이 그린라인으로 부르는 경계선을 넘어와 이스라엘 영내에서 자폭 테러를 벌이는 것을 막는다는 이유로 아예 주민들의 이동을 막는 높이 8m의 콘크리트 장벽을 세우기 시작한 것이다. 현재까지 완공된 장벽의 길이는 700㎞를 넘는다.
이는 국제적으로 인권 문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스라엘은 이를 보안 장벽이라고 부르지만 팔레스타인인들은 인종분리 장벽, 또는 아파르트헤이트 장벽이라고 비난한다. 팔레스타인 정부와 아랍국가들, 서구의 인권단체 등은 이 장벽 때문에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이나 요르단강 서안의 다른 지역으로 출퇴근하거나 이동하는 자유를 제한받는다고 비난한다. 현대판 게토(과거 유럽의 유대인 분리 거주지역)라는 오명을 쓰고 있다. 이스라엘의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는 “이 장벽이 야생 짐승들의 습격을 막아줄 것”이라는 막말을 하며 장벽을 옹호했으나 장벽은 갈수록 이스라엘을 가두는 우리 구실을 하고 있다는 평가도 적지 않다. 게다가 장벽 전체의 15%만 그린라인 위나 이스라엘 영내에 위치하며 85%는 팔레스타인 지역 안에 설치됐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이스라엘은 장벽 건설로 자폭 공격이 2000~2003년 7월 73건에서 2003년 8월~2006년 12건으로 줄었다며 장벽을 해체하지도, 추가 건설을 멈추지도 않았다. 장벽과는 별개로 이스라엘을 대상으로 하는 자폭 공격은 1989년 처음 벌어진 이래 2002년 47건을 정점으로 점차 줄다가 2006년 이후 한 해 1~3건으로 거의 사라졌다. 2003년 유엔총회는 분리장벽은 국제법 위반이므로 제거해야 한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찬성 144, 반대 4, 기권 12로 통과했다. 국제사법재판소도 분리장벽이 국제법 위반이라는 의견을 냈다.

시위대 과잉진압 문제도 도마에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벌어진 반이스라엘 시위에서 부상자가 후송되고 있다. 왼쪽은 팔레스타인 국기. [EPA=연합뉴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벌어진 반이스라엘 시위에서 부상자가 후송되고 있다. 왼쪽은 팔레스타인 국기. [EPA=연합뉴스]

팔레스타인 시위대에 대한 이스라엘 측의 과잉 진압도 비난을 받는다. 지난 14일 이스라엘 주재 미국 대사관이 예루살렘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기면서 촉발된 대규모 시위에서 이스라엘 측이 발포로 맞선 것이 그 하나다. 진안 병력이 고무총알을 사용한다고 해도 몸통이나 머리에 맞으면 치명적일 수 있다. 때로는 어린이가 포함된 가족이 시위대와 진압 병력 사이에 끼었다가 희생되는 비극이 발생해 전 세계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이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국제사회의 연대를 강화할 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국가 이미지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의 건국으로 야기된 팔레스타인의 나크바는 해결 조짐을 보이다 말다를 반복하며 주민들을 비극으로 몰아가고 있다. 옭히고 섥힌 팔레스타인 문제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공존과 중동 평화를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다. 평화와 번영은 함께 누려야 오래 간다. 전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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