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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창부터 떼창까지, 21세기형 판소리 열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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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2012년부터 7년째 새로운 창극을 실험 중인 김성녀 국립창극단 예술감독.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2012년부터 7년째 새로운 창극을 실험 중인 김성녀 국립창극단 예술감독.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축구 경기에 비유하자면, 추가 시간에 쐐기골을 넣은 격이다. 지난 3월로 임기가 만료된 김성녀(68)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이 최근 무대에 올린 창극 ‘심청전’ 얘기다. 임명권자인 국립극장장 공석으로 후임이 정해지지 않아 새 감독이 올 때까지 그의 임기가 연장된 사이 신작 창극 ‘심청가’가 이른바 ‘대박’을 터뜨렸다. 지난달 25일부터 지난 6일까지 총 11회 공연 중 10회 매진을 기록했고, “이런 게 바로 판소리를 살리는 창극의 양식”(윤중강 음악평론가) 등의 호평이 쏟아졌다.

한국창극 지평 넓힌 김성녀씨 #‘심청가’ 11회 공연 중 10회 매진 #국악 무대에 뮤지컬·오페라 접목 #그리스 비극의 웅장함 끌어들여 #김준수 등 스타급 소리꾼도 나와

‘심청가’는 창극의 뿌리인 판소리의 본질을 충실하게 살린 작품이다. 안숙선 명창이 작창·도창을 맡아 심청가의 눈대목(판소리의 중요한 대목)을 판소리 본연의 소리를 그대로 들려줬다. 2012년 예술감독에 부임한 이후 창극의 변화·혁신·파격 등을 부르짖었던 김 예술감독으로선 처음으로 옛 스타일의 창극을 선보여 대성공을 거둔 것이다. 그동안의 실험이 결실을 맺은 걸까, 아니면 결국 판소리의 원형을 살리는 게 창극이 가야할 길이었던 걸까. 그의 답변을 들어보기 위해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을 찾아갔다. 뜰아래연습실에 있는 그의 방에는 지난 6년여 동안 국립창극단에서 공연한 작품들의 포스터와 만원사례 봉투가 촘촘히 붙어있었다. 그는 “객석을 채워준 관객들 덕에 새로운 창극 실험을 맘놓고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판소리의 원형을 최대한 살려 소리의 진수를 전한 창극 ‘심청가’. [사진 국립창극단]

판소리의 원형을 최대한 살려 소리의 진수를 전한 창극 ‘심청가’. [사진 국립창극단]

‘심청가’의 성공 비결은 무엇이라고 보나.
“판소리의 소리를 돋보이게 한 것이다. 혼자 부르는 소리에서부터 그리스 비극의 코러스처럼 웅장하게 울리는 ‘떼창’까지, 소리가 21세기 관객들의 감성을 흔들었다. 미니멀하고 모던한 무대가 판소리의 장점을 부각시켰다. 아는 사람만 알던 판소리의 힘이 재발견된 셈이다.”
판소리의 원형에 충실한 과거의 창극은 이렇게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이번 무대가 달랐던 점은.
“지난 6년간 다양한 창극을 만들어 관객층을 넓힌 효과라고 생각한다. 이전의 창극은 국악인 위주, 몇몇 귀명창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창극이란 게 ‘창’과 ‘극’의 결합인데, 창만 강조됐던 것이다. 판소리는 원형을 지켜야 하지만, 창극은 시대에 따라 변해야 한다. 2012년 예술감독이 되면서 ‘이 시대에 맞는 창극’을 화두로 다양한 실험을 했다. 실패한 작품도 있지만, 우리 소리로 만든 창극의 범위를 어디까지 넓힐 수 있는지 끊임없이 모색했다. 그 결과 연극 관객, 뮤지컬 관객, 오페라 관객 등을 창극 관객으로 끌어올 수 있었다. 역시 판소리가 창극의 힘이라는 걸 이번 ‘심청가’에서 느낄 수 있었지만, 만약 ‘심청가’ 스타일을 6년 동안 했으면 관객들은 지겨워했을지 모른다. 이번에 박수를 많이 받았다고 이걸로 끝나서는 안된다. ‘이것보다 뭔가 더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또 실험하고 또 넓혀가야 한다. 창극은 그래야 한다.”
지난해 싱가포르 공연에 이어 다음달 유럽 무대에 진출하는 ‘트로이의 여인들’. [사진 국립창극단]

지난해 싱가포르 공연에 이어 다음달 유럽 무대에 진출하는 ‘트로이의 여인들’. [사진 국립창극단]

그의 실험은 정말 다양했다. 안드레이 서반, 옹켕센 등 해외 거장들과 오페라·연극·뮤지컬 등 다른 장르의 유명 연출가들(한태숙·이소영·고선웅·이병훈·서재형 등)에게 창극 연출을 맡겼고, 브레히트의 서사극 ‘코카서스의 백묵원’과 그리스 비극 ‘트로이의 여인들’도 창극으로 만들었다. 그가 예술감독으로 부임해 처음으로 기획·제작한 스릴러 창극 ‘장화홍련’은 창에서 박자를 없애버려 “창극이 이럴 수도 있냐”는 논란을 불러오기도 했다. 그는 “‘쿵자작 쿵작’ 등의 박자가 들어가면 흥겨워지거나 슬퍼져서 스릴러가 안된다”며 “창극의 범위를 넓혀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에 욕을 먹어도 힘이 안 빠졌다”고 말했다.

실험의 성과도 컸다. 3∼4일 공연 객석도 채우기 힘들었던 창극에 매진사례가 이어졌고, 뮤지컬처럼 회전문 관객이 등장했다. 또 김준수 등 젊은 창극 배우들에겐 팬클럽까지 생겼다. 돈을 받고 해외 무대에 서는 역사도 새로 썼다. 다음달엔 영국·네덜란드·오스트리아에서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 공연을 한다. 그는 “이제 ‘창극의 시대 아니냐’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며 뿌듯한 심정을 전했다.

그의 예술감독 임기는 최대 내년 3월까지 연장된다. 그는 “이곳을 떠난 뒤에는 배우 김성녀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완성도 있는 연기를 하는 오리지날 배우로 생을 마감하고 싶다”는 것이다. 사실 그의 배우 활동은 이미 시작됐다. 최근 배우 한석규의 엄마 역으로 영화 ‘우상’ 촬영을 마쳤고, 올 12월에는 정의신 연출가의 신작 모노드라마 ‘맛있는 만두 만드는 법’으로 연극 무대에 선다. 그의 올 3월 퇴임을 예상한 공연계·영화계에서 벌써 러브콜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는 “할머니 역할도 다양하지 않겠냐”면서 “장르 상관없이 연기를 하겠다”고 배우로서의 ‘욕심’을 드러냈다.

이지영 기자 jy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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