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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논설위원이 간다

법원 주류에 반기 든 판사…“나 같은 사람도 하나쯤 있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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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상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상언의 사회탐구

‘세상 바뀐 줄 모르는 돈키호테’라고 자신을 표현한 김태규 울산지법 부장판사. 촬영 장소는 부산시 연제구의 부산지법이다. 그는 일주일에 한 차례 집에서 가까운 부산지법에서 근무한다. [송봉근 기자]

‘세상 바뀐 줄 모르는 돈키호테’라고 자신을 표현한 김태규 울산지법 부장판사. 촬영 장소는 부산시 연제구의 부산지법이다. 그는 일주일에 한 차례 집에서 가까운 부산지법에서 근무한다. [송봉근 기자]

김명수 대법원장이 취임(지난해 9월)한 뒤 국제인권법연구회·우리법연구회 출신들이 법원 요직들을 차지했다. 김 대법원장은 두 모임 회장이었다. 진보 성향 판사들이 ‘득세’하면서 일종의 적폐 청산 작업도 벌어졌다. ‘법관 블랙리스트’ 작성 의혹을 규명하겠다며 판사들이 위원회를 조직해 법원행정처 간부 컴퓨터(PC)를 강제로 열었다. 그때 ‘영장 없는 조사’에 공개적으로 반대한 판사가 있었다. 그는 이후에도 여러 차례 법원 주류에 반기를 들었다. 최근엔 청와대가 판사 징계 국민청원 내용을 법원에 전달하자 법원 상층부에 3권분립 원칙을 분명히 밝히라고 요구했다. 그는 도대체 왜 ‘대세’를 거스르고 있을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해 그를 만나봤다.

[논설위원이 간다] #연수원 수료 뒤 변호사 생활하다 #경력 법관 채용으로 판사로 임용 #“판사 PC 강제 조사 영장주의 위배” #’블랙리스트’ 없었다는 판단도 불변 #“법원이 바로 서길 바라는 뜻에서 #돈키호테 같은 역할 계속하겠다”

인터뷰를 요청하자 그가 취지를 물어왔다. “왜 비주류의 길을 자원해서 걷는지 궁금하다”고 답했다. 그러자 “저 같은 판사도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라는 반응이 돌아왔다. 다음날 바로 KTX를 타고 울산으로 내려갔다. 김태규(51) 울산지법 부장판사와의 만남(지난 10일)은 이렇게 이뤄졌다.

이력이 특이하다. 사법연수원에서 바로 법원으로 간 대부분의 판사와 달리 변호사로 시작해 나중에 판사가 됐다. 어떻게 된 일인가.
“사법시험에 합격해 연수원(28기)에 갔을 때 집안 형편이 매우 안 좋았다. 당장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 때문에 판·검사를 할 엄두를 못 냈다. 연수원 나와서 1년 정도 부산의 한 법무법인에서 일하고 고향인 울산에 변호사 사무실을 열어 4년 정도 운영했다. 빚도 다 갚고 돈도 조금 모았다. 그랬더니 ‘인생의 보람’ 같은 게 떠올랐다. 공부 욕심이 생겨 미국 인디애나주립대로 유학을 가 법학석사(LLM) 과정을 밟았다. 귀국 직후 때마침 헌법재판소에서 연구관을 모집해 채용됐다. 그리고 1년 뒤쯤 법원에서 경력 법관 채용(변호사나 검사 중에서 판사를 임용하는 것)을 하길래 지원했다.”
군 법무관 출신이 아니다. 대학 재학 중에 군에 다녀왔나.
“대학 85학번(연세대 법학과)이다. 당시는 고시 공부가 죄악시되던 때였다. 하숙집에서 만난 한 대학 선배는 ‘판·검사가 되겠다는 것은 일본 강점기에 형사가 되겠다고 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말했다. 2학년 1학기 마치고 단기사병으로 18개월 복무했다. 그 하숙집 선배는 비서관으로 이명박 정부 청와대로 들어갔다.”
출생지는 경주로 돼 있고, 중·고교는 울산에서 나왔다. 자신을 TK(대구·경북)와 PK(부산·경남) 중 어느 쪽으로 여기나. 이른바 ‘TK 정서’가 법원 내부 비판에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 물어본다.
“경주에서 서너 살 때 울산으로 왔으니 굳이 따지자면 PK라고 해야 할 것 같다. 특별히 지역색을 의식하며 살아 본 적은 없지만 ‘경상도 사람’이 갖는 특색의 일부를 공유하는 면도 있을 것이다.”
처음 언론의 주목을 받은 것은 1월 2일 법원 내부통신망(코트넷)에 올린 글 때문이었다. 법원행정처 판사 PC 강제 조사에 대해 ‘영장주의라는 형사법의 대원칙에 위반된다는 의심을 야기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한 것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왜 그랬나.
“나는 그 전까지 코트넷 게시판에 한 번도 글을 쓴 적이 없다. 블랙리스트 의혹을 조사하는 위원회가 아무리 개인 소유가 아닌 법원 소유의 물건이라고 해도 사적 정보가 들어 있는 판사 PC를 강제로 조사하는 것은 ‘영장주의’ 위배라는 의심이 많이 가는 상황이었다. 영장주의는 수백 년간 다듬어져 온 형사법의 대원칙이다. 구체적인 의혹 사항과 소명자료가 있다면 검찰로 넘겨 정식으로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아 조사하도록 해야 하는 일이었다. 나는 원칙을 말했을 뿐이다. 당시 문제가 된 법원행정처 전 간부들과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다.”
첫 글을 올리고 나서 약 3주 뒤에는 “블랙리스트는 없었다”고 주장하며 강제 조사를 강행한 판사들에게 해명을 요구하는 글을 다시 썼다. 그 조사에서는 일부 판사들의 성향을 파악해 작성한 문건이 나온 게 사실이다. 아직도 블랙리스트는 없다고 생각하나.
“그것이 블랙리스트로 규정되기 위해서는 인사 등의 불이익이 입증돼야 한다. 김 대법원장도 인사청문회에서 인사 불이익을 블랙리스트의 필요조건으로 설명했다. 그 문건의 내용이 법관 인사에 반영됐다는 증거는 없지 않은가. 당시 조사에서 발견된 ‘동향 보고’ 문건에 문제가 전혀 없다는 것이 아니다. 비난이든, 처벌이든 합당한 조치를 하면 된다.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법원을 통제하는 엄청난 음모가 있었다는 식으로 주장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달에는 전국법관대표회의 의장으로 출마하기도 했다. 이 회의 구성원 대다수가 국제인권법연구회 소속이거나 우리법연구회 출신인데, 당선될 수 있다고 생각했나.
“한 표도 못 받을 각오를 하고 나갔다. 홀로 들판에 선 심정이었다. 법원이 특정 학회 중심으로 조직화, 집단화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독주를 막고 싶었다. 자유주의 국가에서 다양성은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갖고 있다. 무리가 세력이 되고, 세력이 조직을 장악하는 것은 특히 법원에 바람직하지 않다.”
결국 우리법연구회 회장이었던 판사(최기상 서울북부지법 부장판사)에게 완패를 당했는데, 후회하지는 않나.
“93대 23이었다. 아내조차 나 말고는 나를 선택할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했는데 스물세 표나 받았다. 성공했다고 평가한다.”
의장 선거 날 김 대법원장이 법관대표회의에 참석해 블랙리스트 의혹 조사의 정당성을 설명하는 내용이 포함된 인사말을 했다. 표결 직전 일이었다. 부당한 선거 개입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나.
“대법원장 인사말 뒤에 후보들 발언 시간이 있었다. 대법원장은 이미 떠난 상황이었지만 내 발언은 그의 뒤통수에 대고 쓴소리를 하는 형국이 돼 버렸다. 난감한 상황이었다. 대법원장이 투표가 끝난 뒤에 덕담했다면 훨씬 모양새가 좋았을 것 같다.”
지난 4일과 8일에는 청와대 게시판에 오른 판사(정형식 서울고법 부장판사) 파면 국민청원 처리 결과를 청와대가 법원에 통보한 일을 비판했다. 청와대는 “그냥 알려줬을 뿐”이라고 하는데 뭐가 문제인가.
“법원 게시판에 어떤 행정부처의 잘못을 주장하는 글이 오르고 많은 사람이 동의했다고 가정하자. 그때 법원이 해당 부처에게 그 내용을 전달해 주는 것이 옳은 일인가. 법원이 행정부 일을 간섭한다는 비판을 받지 않겠는가.”
정계로 뛰어들 욕심에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내가 판사가 된 것을 무한히 감사한 일로 여긴다.”
계속 ‘비주류’의 목소리를 내다 불이익을 당하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은 안 하나.
“나는 어차피 판사가 된 지 12년밖에 되지 않아 고법 부장판사나 법원장 같은 고위직에 오를 수 없다. 그래서 ‘세상 바뀐 줄 모르는 돈키호테’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난 법과 법원, 판사직을 좋아한다. 이것이 내가 법원이 바로 서기를 간절히 바라는 이유다.”  

이상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