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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패션이 미래의 우주를 만났을 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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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3호 20면

상하이서 열린 에르메스 '2018 멘즈 유니버스' 

‘지구의 중력’ 세션에서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인간 오뚝이들이 우주 공간을 탐험했다. 안무가 요안 부르주아의 공연작이다. 행사에서는 2018 봄·여름 남성복 런웨이를 재현했다.

‘지구의 중력’ 세션에서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인간 오뚝이들이 우주 공간을 탐험했다. 안무가 요안 부르주아의 공연작이다. 행사에서는 2018 봄·여름 남성복 런웨이를 재현했다.

옷·가방·신발에는 자동적으로 ‘입다·들다·신다’라는 동사를 쓴다. 하지만 이제는 ‘체험하다’라는 말도 가능해졌다. 지난 4월 19일 중국 상하이 CSSC(China State Shipbuilding Corporation) 파빌리온에서 선보인 에르메스의 ‘2018 봄·여름 남성 유니버스(Men’s Universe)’가 이를 입증한다. 이 행사는 의류부터 가방·신발·액세서리까지, 이번 시즌 남성 컬렉션을 한 자리에 모았는데, 기존 패션쇼나 프레젠테이션과 달리 관람객이 실제 보고 즐기는 경험을 통해 선보였다. ‘미래적 남성(Fast Forward Men)’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다양한 신제품을 공연의 소품으로, 전시의 작품으로, 체험의 메시지로 변신시켰다. 중앙SUNDAY S매거진이 그 현장을 다녀왔다.

우주 비행 필수품과 우주비행사 모형을 둔 ‘이륙’ 세션. 곳곳에 에르메스 제품을 배치했다.

우주 비행 필수품과 우주비행사 모형을 둔 ‘이륙’ 세션. 곳곳에 에르메스 제품을 배치했다.

영화 ‘스페이스 오디세이’처럼 꾸민 행사장

우주선 내부를 연상시키는 행사장

우주선 내부를 연상시키는 행사장

행사는 ‘유니버스’라는 이름이 꼭 들어맞았다. 한때 조선소였다는 건물은 화려한 불빛으로 치장돼 실체를 알 수 없었다. 입구부터 우주선 탑승을 체험하는듯 했다. 미래로의 여행이었다. 100m는 족히 넘는 육각의 빛의 터널, 이를 통과하고 나면 마치 영화 ‘스페이스 오디세이(2001)’ 같은 공간이 눈앞에 나타났다. 어둠이 짙은만큼 빛이 도드라졌다. “에르메스에 우주선이 들어오고 착륙하는 이미지를 상상했다”는 에르메스 남성복 디자이너 베로니크 니샤니앙(Veronique Nichanian)의 설명 그대로였다.

본격 ‘우주와의 도킹’ 전, 가벼운 ‘워밍업’이 있었다. 지난해 6월 파리에서 열린 2018 봄여름 컬렉션의 런웨이가 재현됐다. 하지만 단순한 ‘리바이벌’이 아님을 분명히 하려는듯, 10여 명의 중국 배우·앵커·아티스트 등을 캣워크에 세워 주목도를 높였다.

모델들은 ‘럭셔리 스포츠룩의 업그레이드’로 정의될 수 있는 의상들을 입고 나왔다. 반짝이는 트랙 팬츠, 오버사이즈의 모자 달린 티셔츠, 레이싱 재킷 등 캐주얼 아이템이 주를 이뤘지만, 절제된 실루엣과 고급스러운 페이턴트 소재를 써 여느 스트리트 패션과의 차별화가 두드러졌다. 컬러 역시 와인·회색·블랙 등에 형광 그린·레드·로열 블루 등을 조합해 강약을 조절했다. 의상·가방 등에 들어간 야구공 자수와 체인 그래픽은 단순하면서도 위트 있는 포인트가 됐다.

드디어 쇼가 마무리되고 저 멀리서 우렁찬 외침이 들려 왔다. “아름다운 우주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바로 여행을 시작할까요?”

가상현실, 360도 카메라 패션을 체험하다

우주선 내부를 연상시키는 행사장

우주선 내부를 연상시키는 행사장

행사는 그야말로 우주 여행이었다. 7개로 나뉜 세션에서는 우주라는 콘텐트가 다양하게 변주됐다. 원형의 행사장 벽면은 ‘이륙’ 세션. 우주궤도 진입을 앞둔 우주선 조종판·사물함 모형이 등장했다. 박물관 같지만은 않았다. 그 어디에서 에르메스의 스카프를 매고, 버킨백을 든 우주비행사 모형을 마주할 수 있을까. 그 사이 사이 시계와 구두가 막 비상을 앞둔 우주인의 필수품인양 배치돼 있기도 했다.

‘실험실’ 세션은 보다 위트가 넘쳤다. 어느 우주 과학자의 연구 현장이 재현된 듯 했다. 곳곳에 놓인 비이커와 실린더…. 그런데 그 속에는 타이·샌들·열쇠고리 등이 가득 차 있었다. 현미경도 예상을 뛰어 넘었다. 눈을 갖다대자마자 에르메스의 실크·가죽 제품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알 수 있는 동영상이 재생됐다.

이번 행사는 특히 다양한 체험이 더해졌다. 강철로 만든 ‘우주선 컨트롤 센터’ 세션은 어둠 속에서 환한 빛이 머리 위에서 쏟아지도록 꾸며 미래적 이미지를 극대화시켰다. 여기에서 관람객이 눈을 뗄 수 없는 건 실제 상황판이 아니라 게임. 닻 모양의 샹 당크르(Cha<00EE>ne d’ancre) 체인을 본딴 뱀을 조작해 움직이는 체험이었다.

어느 우주 과학자의 연구실을 그린 ‘실험실’ 세션. 각종 실험도구 안에 신상 액세서리를 짝지었다.

어느 우주 과학자의 연구실을 그린 ‘실험실’ 세션. 각종 실험도구 안에 신상 액세서리를 짝지었다.

일부 체험은 대기 줄이 늘어섰다. 가장 인기가 많았던 건 360도 사진 촬영을 경험하는 포토존. 아무 사전 안내 없이 나홀로 들어선 공간은 마치 우주정거장을 묘사한듯한 일러스트가 가득했다. “준비됐냐”는 누군가의 목소리와 함께 음악이 시작되면 제맘대로 춤추거나 포즈를 취하는 시간이었다. 고독한 우주에서 자유를 만끽한달까. 또 가상현실(VR) 세션 역시 우주의 환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짜릿함을 맛보기 위해 관람객이 몰려들었다.

놀이공원처럼 들썩대던 행사장 한가운데에선 반전의 하이라이트가 등장했다. 우주의 기운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극도로 정적인 공연이었다. ‘지구의 중력’이라는 제목을 단 이 세션은 2명의 인간 오뚝이들이 360도를 회전하며 끊임없이 움직였다. 그 모습이 마치 중력이 사라진 우주 공간에서 손을 맞잡지 못하고 떠다니는 우주인을 닮아 있었다. “환상적 하룻밤을 즐겨보라”는 주최 측의 말처럼 뜻밖의 장소에서, 경험에서 만나는 또다른 패션이었다.


 “미래는 과거로부터의 혁신에서 온다”

30년 간 에르메스 남성복 디자인 맡은 베로니크 니샤니앙 

우주 하면 흔히 미래를 떠올린다. 하지만 ‘2018 멘즈 유니버스’를 기획한 에르메스 남성복 디자이너 베로니크 니샤니앙(사진)이 말하는 미래는 사뭇 다르다. 이른바 ‘레트로 퓨처리즘’이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의 공존, 과거로부터 혁신을 이끌어낸다는 뜻이다. 이번 행사 역시 우주라는 미래적 공간과 브랜드의 유산과 가치를 결합시킨 시도다. 베로니크는 이탈리아 쿠튀리에 ‘세루티’에서 12년 간 경력을 쌓고, 1988년 이후 지금까지 에르메스 남성복 디자이너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에르메스에서 꼭 30년을 지냈다. 브랜드와 처음부터 뜻이 통했던 것, 반대로 시간이 흐르면서 당신이 혹은 브랜드가 바꾼 것은 무엇인가.  
“처음 작업을 할 때부터 에르메스와 나는 동일한 가치를 공유해왔다. 장인 정신에 대한 열정과 탁월한 솜씨, 그리고 혁신에 대한 가치를 높이 산다. 내가 이토록 오래 한 브랜드에 있을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한 자리에 있다 보면 여느 디자이너들보다 더 새로운 것을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을 것 같다. 
“부담감보다 오히려 새로운 도전들이 더 흥미롭다. 지속적으로 다시 바꾸고, 다시 도전하고, 다시 창조하는 작업이 영감을 주고 동기를 부여한다. 가령 앞으로는 네오프렌(잠수복 소재), 라피아(야자수 섬유) 또는 종이를 소재로 만드는 컬렉션도 염두에 두고 있다. 직물에 대한 혁신과 리서치는 내 주요한 임무다.”  
컬러와 직물, 질감의 조화를 강조하는 디자이너로 알려져 있는데.  
“남성복을 디자인하는데 있어서 이 세가지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소재마다 어울리는 특유의 색상이 있다. 그래서 매 시즌 소재와 컬러 작업을 동시에 진행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컬렉션이라면.  
“30년 전 첫 컬렉션을 꼽겠다. 빨강 캐시미어 코트를 디자인했는데, 당시 남성복으로는 예상치 못했던 탓에 꽤 성공적이었다. 또 하나는 2002년이다. 이때 ‘핀 스트라이프’로 컬렉션을 디자인했는데, 클래식한 맞춤 수트에 적용한 핀 스트라이프가 아니라 가죽과 다른 직물에 시도했던 게 기억에 남는다.”
현재 패션 트렌드의 대세는 젠더리스와 스트리트 무드다. 럭셔리 남성복 디자이너로서는 많은 것을 고려해야 하는 지점인데.  
“트렌드를 꼭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가장 큰 오해다. 스스로 만족한다면, 유행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시간을 초월하는 우주 여행을 그린 ‘시간 여행’ 세션. 미래의 공간에서 8벌의 재킷을 오래 된 유물처럼 전시했다.

시간을 초월하는 우주 여행을 그린 ‘시간 여행’ 세션. 미래의 공간에서 8벌의 재킷을 오래 된 유물처럼 전시했다.

상하이 글 이도은 기자 dangdol@joongang.co.kr   사진 에르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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