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베레조프스키 베토벤 연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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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공연은 각 20분간의 휴식 두 차례를 포함해 오후 4시부터 장장 3시간 30분만에 끝났다. 지난 7일 피아니스트 보리스 베레조프스키(33)의 베토벤 협주곡 전곡 연주회에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을 가득 메운 청중은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는 일요일 오후의 여유를 즐기며 베토벤 삼매경에 빠졌다.

외국 피아니스트의 내한 공연일 경우 독주회 아니면 협주곡 1곡 듣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게 보통이지만 이날만큼은 거두절미하고 5개의 협주곡만으로 프로그램을 골랐다. 오케스트라 관악기 주자들이 군데군데 교체돼 들어오는 모습이 눈에 띄었고 피아니스트와 관객은 모두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마라톤 코스'를 완주해냈다.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프로그램에다 '인내심 싸움'이었기에 피날레곡으로 연주된 '황제'의 3악장이 끝난 후 오케스트라.피아니스트.관객 모두가 맛보는 기쁨은 남달랐다. 에피타이저(서곡)과 메인 디시(교향곡)을 생략한 채 파스타(협주곡)만 종류별로 다섯 접시나 비운 포식감에 비유할 수 있을까.

지칠 줄 모르는 파워와 흐트러짐 없는 여유를 과시하던 베레조프스키도 마지막 제 5번 '황제'에서는 귀에 거슬리는 미스 터치를 여러차례 노출했다. 진지함과 무게가 실린 베토벤보다 모차르트와 리스트의 양극을 오가는 가벼운 해석으로 일관했다. 베토벤 협주곡 전곡 연주는 그 자체가 거대한 '5악장짜리 작품'이다. 그런 점에서 베레조프스키는 각 '악장'간의 대조나 성격 부각은 접어둔 채 큰 실수 없이 악보대로 '신기록'을 수립하는 데에만 골몰했다.

유라시언 필하모닉은 지휘자 없이도 의욕적이면서도 치밀한 앙상블을 들려줬다. 하지만 아직 연륜이 짧아 전체적으로 악기군 간의 융합이나 세련된 맛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날 공연에서 또 하나의 주인공은 포르티시모나 고음에서도 따뜻한 현의 울림과 풍부한 사운드를 과시한 길이 3m8㎝, 무게 6백90㎏의 이탈리아산 파지올리 피아노였다.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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