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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리·어코드의 굴욕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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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도요타 캠리와 혼다 어코드는 1990년대 미국 자동차 시장을 둘로 나눠가진 베스트셀러였다. 고장이 적고 연비가 좋을 뿐 아니라 중고차 값도 비교적 좋아서 예약 구매가 몰렸다. ‘메이드 인 재팬’에 대한 미국 소비자들의 선호까지 더해지며 물량이 없어서 못 파는 승용차로 통했다.

한때 없어 못 팔던 미국시장 전설 #SUV·픽업트럭에 밀려 퇴물 취급 #캠리, 275만원 장려금 주며 판촉 #어코드, 10세대 모델로 회복 기대

그랬던 ‘전설의 세단(승용차)’이 요즘 들어 ‘퇴물’ 취급을 받고 있다. 공간 활용도가 높은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과 픽업트럭에 밀리면서다.

시장정보업체 모터인텔리전스에 따르면 지난 1분기 미국에서 SUV와 픽업트럭은 274만대가 팔렸다. 세단 판매는 137만대에 그쳤다. 2013년 역전이 이뤄진 이후 격차가 점점 벌어지는 중이다. 지난해 전체로 SUV·픽업트럭 판매는 1105만대였지만, 세단 판매는 608만대 수준에 그쳤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도요타와 혼다의 경영진이 과거의 영화에 집착하는 점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도요타자동차의 도요다 아키오 회장은 지난해 1월 디트로이트 모터쇼에서 10세대 캠리를 선보였다. 그는 “이번 캠리를 통해 중형 세단 시장에서 다시 불을 붙일 기회를 본다”면서 “왜 SUV가 모든 영광을 독차지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소비자는 SUV와 크로스오버 차량(CUV), 픽업트럭을 선호하는데, 최고 경영진이 시장을 잘못 읽고 있다는 비판이 나왔다. 쏘나타와 옵티마를 앞세운 현대·기아차가 미국 시장에서 고전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혼다의 상황은 더 나쁘다. 혼다는 올해 초 10세대 어코드를 선보이며 명성 되찾기에 나섰다. 디트로이트 모터쇼는 어코드를 ‘북미 올해의 차’로 선정했다. 시장의 반응은 달랐다. 지난 1분기 어코드의 판매 대수는 구형 모델을 팔았던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12% 줄었다. ‘소비자가 원하지 않는 올해의 차’라는 비아냥이 뒤따랐다.

과열 양상을 보이는 판매장려금 정책도 혼다의 부진에 한몫했다. 시장정보업체 제프리스에 따르면 혼다는 어코드의 초기 판매가(2만3570달러짜리 LX 하이브리드 기준)에 848달러(약 91만원)의 판매장려금을 책정했다. 도요타는 혼다보다 훨씬 많은 2557달러(약 275만원)의 판매장려금(2만3495달러짜리 L스펙 기준)을 지원했다. 일단 팔고 보자는 도요타의 고민이 숨어있다.

중형 세단 시장에서 캠리의 점유율은 15%, 어코드는 10%로 격차가 벌어졌다. 혼다도 판매장려금을 높이고 싶지만 속만 태우는 중이다.

혼다 아메리카의 세이지 쿠라이시 최고운영책임자(COO)는 “가격을 건드리면서 ‘치킨 게임’에 휘말릴 수 없다”며 “어코드 신모델의 매력을 많은 사람이 알아주기를 기다릴 뿐”이라고 말했다.

대신 혼다는 SUV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현지 공장 생산라인에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혼다는 오하이오주 공장에서 CR-V와 아큐라 RDX 모델을 연간 24만대 생산한다. 지난해 미국 시장에서 두 모델의 판매는 수입산까지 포함해 43만대에 달한다.

미국 자동차 업체도 고민스럽기는 마찬가지다. 포드는 스포츠카와 SUV에 주력하면서 당분간 토러스와 퓨전·피에스타 등 세단 부문에서 신차를 출시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세단에 주력하는 일본 자동차 업계는 최근의 유가 상승세를 반기고 있다. 이들은 국제 유가가 배럴당 70달러 이상을 유지하길 바란다. SUV와 픽업트럭을 모는 미국 소비자가 연비가 좋은 세단으로 다시 몰릴 수 있다는 기대에서다. 하지만 SUV와 픽업트럭의 연비도 예전보다 좋아지고 있다. 따라서 기름값이 아주 비싸지 않으면 세단의 영광을 재현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뉴욕=심재우 특파원 jwsh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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