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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헌 ‘노동이사제’ 소신 … “늑대 대신 호랑이 만난 격”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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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2호 14면

김기식 후임 금감원장 임명 

윤석헌 신임 금융감독원장이 4일 오후 활짝 웃으며 서울 통의동 금융감독원으로 들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헌 신임 금융감독원장이 4일 오후 활짝 웃으며 서울 통의동 금융감독원으로 들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재벌들과 관료들은 늑대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 것.”

개혁 성향 강한 금융경제학자 #“외부 발탁으로 충격 줄 적임자” #‘이건희 차명계좌에 과징금’ 의견 #은산 분리 규제 완화에 부정적 #금융위 해체해 감독 기능 통합 #가능성 없는 좀비기업 정리 입장 #금융·재벌 개혁 속도 낼 가능성 #법·제도 바꿔야 해 실현될지 주목

4일 윤석헌(70) 전 숭실대 금융학부 교수가 신임 금융감독원장으로 임명되자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최종구 금융위원장의 제청을 받아 윤 전 교수를 금감원장에 임명했다. 금융위는 윤 원장에 대해 “급변하는 금융환경에 대응해 금융감독 분야 혁신을 선도적으로 이끌어 갈 적임자로 평가했다”고 임명 제청 사유를 밝혔다.

윤 원장은 대표적인 개혁 성향의 금융경제학자로 꼽힌다. 현 정부 출범 뒤 금융위원장 직속 금융행정혁신위원장을 맡아 금융개혁 로드맵 설계에 깊이 관여했다. 지난해 말 내놓은 금융혁신 권고안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차명계좌에 대한 과징금 부과 ▶금융·공공기관에 대한 노동이사제 도입 ▶은산(은행과 산업자본) 분리 완화에 대한 부정적 입장 등 파격적인 내용을 담았다.

경기고와 서울대 경영학과를 나온 윤 원장은 한국은행에서 6년간 재직한 뒤 미국 노스웨스턴대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캐나다 몬트리올에 있는 맥길대 경영대학에서 8년간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귀국한 뒤 한국금융연구원·한림대·숭실대 등에서 재직했다. 한국씨티은행·HK저축은행·ING생명 등 주요 금융회사 사외이사를 지냈다.

금융에 정통하지만 관료 출신은 아니고, 현실 참여적인 성향이 강하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한 분야는 과감한 외부 발탁으로 충격을 줘야 한다”는 문 대통령의 의도와 맥이 닿는 인물이라는 평이다. 개혁 성향이 강한 비관료 출신이 금융감독당국 수장이 됐다는 점에서 금융개혁이 힘을 받을 것이라는 긍정론과 금융위원회와의 관계 등 현실의 벽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신중론이 동시에 나온다. 한편 전관예우를 방지하기 위해 금감원 직원에게 종신 재직권을 주자는 파격적인 아이디어를 내놓기도 했다.

“금융 산업정책과 감독 기능 분리해야”

“금융위원회의 문제는 금융 관련 산업정책과 감독정책을 모두 관장한다는 데 있습니다. 자동차의 액셀러레이터와 브레이크를 묶어 놓은 셈이죠.” (2016년 공저 『비정상 경제회담』 p.161)

윤 원장은 금융감독 체제 개편에 분명한 소신을 갖고 있다. 현재 금융위를 해체해서 금융산업정책 업무는 기획재정부의 국제금융정책 업무와 합치고, 감독 기능은 금감원으로 통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금감원의 감독 기능과 소비자 보호 기능을 분리하자는 의견도 내놓았다. 그는 책에서 “금융기관의 건전성 감독을 책임지는 감독기구와, 금융시장·소비자 보호를 책임지는 행위 규제기구로 이분하는 게 금융시장 발전과 소비자 신뢰회복을 위해 필요하다”며 “학계와 전문가들 사이에선 어느 정도 공감대가 형성된 내용”이라고 주장했다.

금융감독 체제를 포함한 정부 조직 개편 문제는 6월 지방선거 이후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떠오를 전망이다. 윤 내정자는 책에서 “2008년 이명박 정부 들어 당시 재정경제부의 금융정책국과 금융감독위원회를 합쳐 금융위를 만들어서 (가계부채) 문제를 더 악화시켰다”고 지적했다.

“인터넷 전문은행을 핑계로 은산분리 규제완화를 추진하려는 것 같은데, 인터넷 전문은행의 이득보다 은산분리 규제완화 비용이 훨씬 많아서 비교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비정상 경제회담』 p.154)

윤 원장은 산업자본의 은행지배 금지, 즉 은산분리 규제를 완화하는데 부정적이다. 인터넷 전문은행은 무엇보다 기존 은행의 인터넷 뱅킹 업무를 활성화하는 정도면 족하다는 것이다. 핀테크(금융과 정보기술의 결합)에 대해선 “금융 자율화를 보장해 주고 감독체계를 튼실하게 해놓고 마음껏 해보라고 하면 경쟁력있는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라는 입장이다.

기업 구조조정과 가계부채에 대해서는 매우 심각한 상황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회생 가능성이 크지 않은 좀비 기업이 정부나 채권단의 지원으로 간신히 연명하며 한국경제에 또 하나의 불씨를 던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현재의 증가세가 지속되고 소득창출이 부진하다면 가계부채발 금융위기 가능성은 시간문제”라며 “만약 주택가격 붕괴나 소득 감소 등 충격이 발생하면 저소득층이나 자영업자의 대규모 파산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평생 직장 보장해 전관예우 막자

“공무원의 힘 중 하나가 선후배가 알아서 서로 끌어주고 밀어준다는 것입니다. 그런 식의 연결고리로 엄청나게 힘있는 집단이 됐어요.”(『비정상 경제회담』 p.290)

윤 원장은 관료 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전관예우를 꼽는다. ‘금피아(금감원+마피아)’라는 비판을 받는 금감원에 대한 시각도 비슷하다. 그런데 그 대안이 엉뚱하다. “일정한 성과요건을 만족하는 금감원 시니어 검사역에게 대학교수처럼 ‘종신 재직권’을 보장해서 퇴직 후 낙하산으로 갈 생각을 하지 않게 하자”는 것이다. 후배가 상급자로 오면 선배는 사표를 내고 금융회사 감사 등으로 재취업하는 잘못된 관행을 막고 전문성도 살릴 수 있다는 취지다. 우수한 외부 전문인력을 유치하기 위해 공직자윤리법 규제를 완화하자는 주장을 내놓기도 했다.

반면 금융업체 최고경영자(CEO)의 ‘셀프 연임’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이다. 금융지주 회장이 사외이사를 선임하고, 이들로 구성된 후보추천위원회가 같은 회장을 재선임하는 식의 ‘셀프 연임’은 내부에서 참호를 구축하는 셈이라는 것이다. 윤 원장은 “국민 입장에서 보면 불공정하고 투명하지 않다”며 “이를 적절하게 모니터링하는 것을 관치라고 나무랄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금융권 근로자 추천 이사제 도입될까

윤 원장은 지난해 말 금융·공공기관 노동이사제 도입을 권고했다. 내부 견제가 이뤄져 낙하산 방지 및 지배구조 투명성 제고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금융위는 이 권고를 채택하지 않았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근로자 추천이사제나 노동이사제 도입을 법이나 제도로 정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밝혔다. 지난 3월 금융위가 발표한 ‘금융회사 지배구조 개선방안’에도 노동이사제나 근로자 추천이사제는 제외됐다.

이 때문에 윤 원장이 자신이 그린 설계도대로 금융 개혁을 시공할 수 있을지 행보가 주목된다. 그가 관심을 갖고 있는 금융개혁 과제 대부분이 규정이나 법을 바꿔야 하는 문제인데, 이는 금융위원장이나 국회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금융위가 금감원의 예·결산을 포함한 기관운영 및 업무 전반을 통제하고, 금융관련 법체계도 금감원장보다 금융위원장에게 더 큰 권한을 주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윤 원장은 문재인 정부 들어 세 번째 금감원장이다. 최흥식 전 원장은 하나금융 채용 비리에 연루돼 6개월 만에 낙마했다. 뒤를 이은 김기식 전 원장은 과거 국회의원 시절 외유성 출장과 임기 말 셀프 후원금 논란으로 2주 만에 자리에서 물러났다.

주정완·박현영 기자 jw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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