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그림 ? 완성품 ! 드로잉 의 재발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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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방비로 하늘을 나는 자화상에 ‘무제’라 제목을 붙인 김지원씨는 “그림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수없이 많을 수도 있고, 아무것도 없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오른쪽 작은 사진은 ‘우당탕탕’전에 나온 김태헌씨의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많은 것들-오목두기’.

한 남자가 하늘에서 뛰어내린다. 낙하산도 없이 맨주먹 맨발이다. 내용처럼 그림 형식도 최소한의 선 몇 개로 이뤄진 담백한 드로잉이다. 남자는 땅에 떨어지기 전까지 창공에 머물러 있는 그 순간만은 시원하고 자유로워 보인다. "나중 일이야 그때 생각하지요." 화면 속 주인공인 화가 김지원(45.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씨는 느긋하다. "그림의 시작, 그림을 넘어선 그림이랄까요. 본격 그림에 들어가기 전 나를 흔들어보는 드로잉을 좋아합니다."

서울 한강로 '가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김지원 초대전-비행(飛行)'은 드로잉만으로 1, 2층 전시장을 꽉 채웠다. 흔히 본격 유화나 채색화를 위한 밑그림, 소묘(素描)쯤으로 치는 드로잉이 독립을 선언하며 그만의 힘을 뽐내고 있다. 주로 종이 위에 볼펜과 과슈(불투명 수채화)로 크게, 천천히, 부드럽게 그린 그림은 성글면서도 꽉 차 있다. 김씨는 "종이에 볼펜으로 드로잉을 하면 지울 수가 없는데, 지울 수 없는 것과 틀린 것을 그냥 드러내는 것이 볼펜 드로잉의 애초의 목적"이라고 말했다. 볼펜 드로잉은 우리 삶과 닮았다. 그는 "드로잉이란 그림의 하위 개념이 아니라 독립적인 것이고, 드로잉과 그림은 똑같이 중요하다"고 했다. 전시는 28일까지. 02-792-8736.

한국 미술계에서 찬밥 신세로 밀려나 있던 드로잉을 즐기는 작가와 관람객이 늘고 있다. 드로잉의 재발견이다. 드로잉은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본질을 정직하게 드러내는 형식이다. 거장으로 평가된 많은 작가가 남긴 드로잉이 걸작으로 인정받는 것이 그 증거다. 드로잉은 값이 많이 뛴 유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싸면서도 질이 뛰어나 수집가에게도 사랑받는다.

서울 인사동 '갤러리 눈'에서 18일까지 열리는 '우당탕탕'전에도 일찌감치 드로잉에 눈뜬 작가들 작품이 선보이고 있다. 김을.김지원.김태헌.김학량씨가 세상과 일상사에서 주워 담은 작고 소담한 드로잉을 내걸었다. 김학량(42.동덕여대 큐레이터학과 교수)씨는 이렇게 드로잉 예찬론을 편다. "예술은 세계에 대한 개념적 드로잉이랄까. 자칫 제스처나 효과에서 멈추어 버릴지라도 그 업은 어느 순간 제 삶 멀쩡히 경영하던 사람들을 불러 세워 통곡이라도 할 만하게 뒤통수를 냅다 갈겨버리기도 하니까." 밤 10시까지 개관한다. 02-747-7277.

경매사도 드로잉에 눈돌렸다. K옥션은 19일 오후 6시 서울 사간동 경매장에서 여는 4월 정기 경매의 주제를 드로잉과 판화로 잡았다. 국내외 종이 작품 126점이 나오는데 이 가운데 100만 원 이하에서 경매를 시작하는 작품이 70%, 50만 원 밑에서 시작가를 잡은 작품도 전체의 40%를 차지한다. 억대 작가로 자리잡은 박수근(1914~65)의 볼펜 스케치 한 점이 120만 원에 나와 눈길을 끈다. 경매 작품은 12~18일 경매장에서 볼 수 있다. 02-2287-3600.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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