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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마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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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시인 김현승(1913~75)은 '아버지의 마음'(70년 발표된 '절대 고독'에 수록)이란 시를 통해 아버지를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존재로 묘사했다.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처럼 어린 것들의 앞날을 생각하는 사람이 아버지라는 것이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는 구절에서 가족들에 대한 사랑과 희생을 표현했다. 권위적인 겉모습과는 달리 자신의 존재에 대한 허무감과 가족들에 대한 걱정으로 괴로워하는 것이 아버지의 실체라는 것이다. 당시 이 시는 가부장제의 시대 상황에서 파격적인 것으로 평가받았다.

박목월(1916~78)도 '가정'이란 시에서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아버지의 의식을 토로했다.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내가 왔다/아버지가 왔다/아니 십구 문 반의 신발이 왔다/아니 지상에는/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존재한다/미소하는/내 얼굴을 보아라." 이 시에는 가족들을 위해 온갖 수모를 감수하면서도 자신의 존재는 하찮은 것으로 평가받는 것에 대한 아버지의 복합적인 심리가 들어 있다.

과거 우리에게 아버지는 엄격하면서도 존경의 대상이었다. 한 독자는 기고문을 통해 "아버지는 기분 좋을 땐 헛기침을 하고, 겁이 날 땐 너털웃음을 짓는 사람"이라고 했다. 아버지의 마음은 먹칠을 한 유리 같아서 속은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울 장소가 없어 슬픈 사람이 아버지라는 것을 우리는 성장하면서 알게 됐다.

하지만 작금의 아버지는 변하고 있다. 유교적 틀이 없어지면서 역설적으로 아버지의 자리를 지켜줄 아내와 자식의 보호막이 사라진 것이다. 아내와 함께 육아와 가사를 맡아야 하고, 아이들의 친구가 돼야 한다. 좋은 아버지가 되기 위한 모임이 생기고, 이를 위한 교육프로그램까지 나왔다.

최근 아들을 위한 아버지의 과도한 '헌신'이 사회적 이슈를 만들었다. 한 재벌그룹 회장은 아들에게 경영권을 승계시켜 주기 위한 무리한 시도를 하다 검찰의 수사를 받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 스포츠 선수의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소동을 벌여 구설에 올랐다. 아버지의 존재가 시대 상황에 따라 변하고 있지만 역시 아버지는 먼 산의 바윗돌처럼 듬직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온갖 욕망이 넘실대는 현실 앞에선 무기력해지는 게 또한 아버지의 마음인 것 같아 머리만 복잡해진다. 표표히 떨어지는 낙엽에도 흔들리는 게 인간의 마음이니깐.

박재현 사회부문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