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뚫린 소 떼 길 통해 남북 경협도 재개될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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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1998년 '소떼 방북'을 위해 소 고삐를 잡고 환송 인파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다.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1998년 '소떼 방북'을 위해 소 고삐를 잡고 환송 인파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다.

1989년 1월 3일 북한의 동양화와 도자기 등 예술품 612점이 부산항에 도착했다. 1988년 연말 북한 남포항에서 선적된 것으로 (주)대우가 들여온 것이다. 1988년 10월 대북 물자교류에 관한 기본지침 제정 덕택에 가능했던 이 예술품 수입은 최초의 남북 교역 사례였다.

정상회담 후 경협 재개 관측 #1988년 북 도자기 수입 시작 #위탁가공 교역 등 30년 역사 #2016년 개성공단 폐쇄로 중단 #재개시 금강산 관광 재개 전망 #동·서해 및 DMZ 공동개발도 #미국의 대북 제재 해제 필요 #국민 공감대 형성 등 과제도

남북 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개최되면서 남북 경제협력 재개에 대한 기대감도 커지고 있다. 이번 정상회담은 철저하게 비핵화에 집중하면서 남북 경협에 대한 논의는 없었다. 전문가들은 조만간 경협 재개에 대한 논의도 이뤄질 것으로 조심스레 예상한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지난 20일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 방침 등을 발표하면서 “현 단계에서 전당, 전국이 사회주의 경제건설에 총력을 집중하는 것, 이것이 우리 당의 전략적 노선”이라고 말했다. 핵무장과 경제 발전의 병진 노선에서 경제 올인으로의 전략 수정을 공식화한 것이다.

중국이나 베트남식의 개혁개방 정책 천명이라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북한이 개방 경제 체제를 구축하고 경제 성장에 나서려면 남한의 투자와 지원, 남북 경제 교류 재개가 필수적이다.

1988년 시작돼 30년에 가까운 역사를 가진 남북 경협은 그동안 정치적, 군사적 사건들에 의해 부침을 거듭해왔다. 2016년 개성공단 폐쇄 이후 현재까지는 중단된 상황이다.

남북 경협의 시발점은 1988년의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 이른바 '7ㆍ7선언'이었다.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이 선언을 통해 남북 간 교역 문호 개방을 천명했고 그해 말부터 예술품 수입을 시작으로 남북 교역이 개시됐다.

(주)대우에 이어 코오롱상사가 1989년 홍콩 현지법인을 통해 북한으로부터 16만 달러 상당의 도자기와 인삼주 등을 구매하면서 북한 대성은행에 처음으로 신용장을 개설했다. 남한 회사가 북한 은행에 직접 신용장을 개설한 첫 사례다.

1989년 1월에는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경제인으로는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북한 주석을 만났고, 금강산 관광의 시발점이 된 '금강산 남북공동개발 의정서'를 체결했다. 1992년 2월부터는 남북 간 위탁가공 교역이 시작되면서 남북 경협이 본궤도에 올랐다.

1993년 북핵 위기와 이듬해 김일성 주석의 사망으로 잠시 위축됐던 남북 경협은 그해 10월 제네바 북핵 합의 이후 1차 남북경협 활성화 조치가 발표되면서 재차 활성화했다. 하지만 1996년 북한 잠수함 침투 사건과 이듬해 외환위기로 또다시 주춤했다.

1998년 '통일의 소'를 실은 차량행렬이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으로 들어가고 있다. 이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도 이 길을 통해 남북을 오갔다.

1998년 '통일의 소'를 실은 차량행렬이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으로 들어가고 있다. 이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도 이 길을 통해 남북을 오갔다.

그러다가 1998년 2차 경협 활성화 조치와 금강산 관광의 시행으로 전성기를 맞았다. 남북 경협 전성기를 끌어낸 상징적인 사건이 정주영 회장의 ‘소 떼 방북’이었다.

현재 북한 영역인 강원 통천 출신의 정 명예회장은 6월 1차 방북 때 소 500마리, 10월 2차 방북 때 소 501마리 등 총 1001마리를 몰고 휴전선을 넘는 장관을 연출했다. 2차 방북 한 달 뒤 금강산 관광이 시작돼 2008년까지 10년 가까이 수많은 남쪽 관광객들이 금강산을 찾았다.

분단이후 금강산의 첫 손님이 된 관광객들이 11월21일 천선대에 올라 금강산관광의 백미인 만물상을 둘러 보며 환호성을 지르고 있다. [금강산=김진석]

분단이후 금강산의 첫 손님이 된 관광객들이 11월21일 천선대에 올라 금강산관광의 백미인 만물상을 둘러 보며 환호성을 지르고 있다. [금강산=김진석]

2004년에는 개성공단 가동이라는 남북 경협의 대표적 열매가 맺어졌다. 1989년 1900만 달러에 불과했던 남북 교역액은 2007년 17억9800만 달러로, 무려 95배나 늘어났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들어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2008년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건으로 금강산 관광이 중단됐다. 2010년 천안함 사건 이후 대북 경제제재인 5.24조치가 발표되면서 분위기가 급속도로 냉각됐다.

개성공단도 2013년 북한의 가동 잠정 중단 사태를 거친 뒤 결국 2016년 2월 북한 4차 핵실험 이후 폐쇄됐다.

북한은 11일 오후 개성공단을 폐쇄하고 군사통제구역으로 선포했다. 또 공단에 있는 남측 인원 전원을 추방하고, 남측의 자산을 전면 동결한다고 밝혔다. 이날 밤 개성공단에남아 있던 남측 인원 280명 전원이 남북출입사무소(CIQ)를 통해 귀환했다.

북한은 11일 오후 개성공단을 폐쇄하고 군사통제구역으로 선포했다. 또 공단에 있는 남측 인원 전원을 추방하고, 남측의 자산을 전면 동결한다고 밝혔다. 이날 밤 개성공단에남아 있던 남측 인원 280명 전원이 남북출입사무소(CIQ)를 통해 귀환했다.

경협이 재개될 경우 일단 개성공단 재가동 및 금강산 관광 재개가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 여기에 남북 철도와 도로, 항로 연결 등 인프라 구축이 뒤를 이을 수 있다. 남북경협 차원에서 진행된 경의선(문산ㆍ개성)과 동해선(고성ㆍ온정리) 철도 연결공사는 이미 종료됐고 2007년 5월 철도 연결 시험운행까지 한 상태다.

중장기적으로는 보다 큰 틀의 남북 통합 발전 계획이 본격화할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미 지난해 잇따라 발표한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 신북방정책 등에서 남북 통합 개발 전략을 발표했다. 서해안과 동해안, 비무장지대(DMZ) 지역을 동시 개발한다는 게 핵심이다.

동해권 에너지 자원 벨트 구축 전략은 금강산, 원산(관광), 단천(자원), 청진, 나선지역(산업단지, 물류인프라)의 남북 공동개발을 통한 동해 동해안과 러시아를 연결하는 내용이다.

서해권 산업물류교통 벨트 건설 전략은 서울-인천-해주-개성의 수도권과 개성공단, 그리고 평양ㆍ남포ㆍ신의주를 연결하는 경협 벨트를 건설하자는 내용이다.

여기에는 경의선을 개보수해 서울-베이징 고속교통망을 건설하자는 원대한 구상도 포함돼 있다. 설악산ㆍ금강산ㆍ원산ㆍ백두산 관광 벨트 구축 및 DMZ 생태ㆍ평화안보 관광지구 공동 개발 계획도 한 축을 이루고 있다.

한반도 신경제지도

한반도 신경제지도

경협이 중국, 러시아 등으로 확대될 경우 나진ㆍ선봉 지구 등 북·중 접경 지역 공동개발과 북한 지역 내 러시아 가스관 건설 등 사업으로 범위를 넓힐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도 나오고 있다.

남북 경협이 북한 경제 발전 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전문가들은 성장 정체기를 맞고 있는 남한에 있어서도 새로운 돌파구가 될 수 있다고 기대한다.

양문수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기업 투자 부진과 저출산ㆍ고령화에 따른 생산 잠재력 저하, 양극화와 소득 불평등의 심화 등으로 인해 장기침체의 늪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한국경제의 위기를 타개할 새로운 대안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공감대가 확산하면서 남북경협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물론 남북 경협의 재개를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무엇보다도 미국 등의 국제 사회가 대북 제재를 해제해야 북한 투자 및 남북 경협의 재개가 가능해진다. 남북 정상회담뿐 아니라 북미 정상회담 결과까지 모두 지켜봐야 하는 이유다.

남북 경협 재개에 대한 국민적 합의도 필요하다. 그동안의 남북 경협에 대해 ‘북한에 대한 돈 퍼주기’라는 식의 못마땅해하는 시선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경협을 통해 북으로 흘러간 자금이 핵무기 개발에 사용됐다는 시각도 적지 않았다.

이해정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충분한 논의를 통해 형성된 국민적 합의에 바탕을 두고 단계적으로 사업을 추진해야 할 것”이라며 “정부는 남북경협이 평화에 기여한다는 장기적 관점에서 경협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을 국민이 공유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연구위원은 “정부와 민간의 역할을 분리해 접근해야 할 필요도 있다. 정부는 경협 활성화 토대 강화를 위해 평화 정착 및 제도화를 집중해야 하고 민간은 남북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상생의 사업을 발굴해 추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제재 해제 이전이라도 인도적 지원 사업 등 대북 제재의 틀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추진 가능한 사업부터 시작해 남북 경협 재개를 위한 로드맵을 만들어 둬야 한다”고 말했다.
세종=박진석 기자 kaila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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