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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인간문화재를 찾아서|베틀노래 벗삼아 길쌈 60년|곡성 돌실낳이 김점순할머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마의대자는 삼베옷을 입고 혈혈단신 산 속으로 숨어들었다. 비단옷을 벗어던지고 삼베옷차림이 됐다는 것은 이미 왕족이라는 특별한 신분이 아니라 평범한 백성이 됐다는 분명한 징표로서의 뜻을 가진다.
신라 사회에서 신분을 나타내는 공복의 식별은 자·비(홍)·청·황의 순서였다.
그것은 백제에서도 비슷하였고 고려시대에도 그와 같았다. 그런 시대의 한정된 옷감사정으로는 염색했다면 당연히 비단이다. 이태조가 상장군이 채색비단옷을 입었다고 해서 특명을 내려 심문하게 한 사건도있었다.
그런데 2백년뒤 『지봉유세』에서 이르기를 「사대부나 서민들이 고운 비단(사라)을 입고 창녀와 천민까지 멋대로 색채있는 피륙(채금)을 입는다」며 세상의 변화를 지적한바 있다.
여기서 지봉 이수광이 지적한 비단이 명주이상의 것인지 무명까지 포함할수 있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삼베옷을 갖은 물색으로 물들였다는얘기는 별로 들어본 적이 없다. 대체로 삼베가 서민들의 일반적인 복색이었다는 것은 옷감 본연의 순색을 입었다는 반증이 된다.
중국의 신석기시대에 해당하는 5천년전 황하유역에서는 삼(대마)을 재배했다고 하거니와 일본에서는 2천년전 야요이 중기의 유적으로부터 마직의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보고돼 있다. 한국의 경우 김원룡박사는 4천년전 패총 유적의 골침으로 미루어 마사가 사용됐을성 싶다고 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평직의 삼베가 확인되기는 전남 함평의 석관묘유적(BC 2∼3세기)이 가장오래된 예다.

<어디서나 잘 자라>
어쨌든 삼은 중앙아시아및 히말라야서북지방 원산의 식물로 일찍부터 튼튼한 섬유로서 재배됐음을 짐작할만하다. 그리고 그것은 북쪽 통로를 통하여 한반도를 거쳐 일본에까지 건너가지 않았을까.
현존하는 전래 옷감의 4가지 대종, 즉 무명·모시·명주·삼베중에서는 단연 삼베가 앞섰을밖에 없다. 옛 문헌에 의하면 모시는 고려때부터 나타나고 무명의 보급은 14세기의 일인데 모시와 무명은 주로 남쪽에서만 난다. 그에 비하여 삼은 전국적으로 분포가 골고루 잘 돼있었다.
한반도에선 북쪽이든 남쪽이든, 산간이든 들녘이든 어디서나 삼베가 성했다. 과거 서민사회에서는 무명조차 귀한 것이어서 살아서도 삼베요 죽어서도 삼베로 일관했다. 수의를 비롯한 상포야말로 오랜 관습이다. 『열 식구가 여름을 나려면 삼베 20필은 가져야 입였어요. 못자리 할 때까진 명 중이적삼을 입다가 모심을 때부터 삼벨 입기 시작하면 추석이나 돼야 명으로 갈아 입었어요. 옛날에도 철철이 입성이있었었지라요.』
평생을 길쌈으로 살아오는 김점순할머니(70세)의 회상이다. 그는 7∼8세에 할머니 무릎에 앉아서 무명실 잣는 일을 배웠고 11세에는 베틀에 앉아 짜기 시작했다. 환갑 나이에 중요무형문화재 32호 「돌실낳이」의 솜씨를 인정받았고 요즘도 농사가 없으니 오로지 길쌈으로 생활한다. 아들 며느리가 도시로 떠난뒤에도 산가를 지켜 떠날마음이 없단다. 일하는 생활이곧 할머니의 낙이요 건강이기때문이다. 전남 곡성의 돌실은 한자로 석곡. 글자 그대로 섬진강 상류의 돌많고 척박한 산골짜기다.
물론 조선시대에는 배포남목이라 일컬었다. 반도의 북쪽에서는 좋은 삼베가 나는 반면 삼남에서는 무명이 많이 생산된다는 말이다. 19세기초 우리나라의 유명물산 가운데는 육진의 발이내포 혹은 통포라는것을 반드시 지목하였다 (오주연문및 규합총서). 조선시대의 육진은 두만강 일원에 특별히 설치한 병영의 일컬음이요, 그지역에서 직조되는 삼베가 하도 고운 것이어서 한필을 물에 적시어 담으면 바리때 하나에 찬다는데서 생긴 극세포의 별칭이다.

<함배세포가 으뜸>
그런데 왜 하필 가장 추운 함북의 세포일까. 1년초인 삼이 잘 재배되기는 더운 남쪽의 조건에 어찌 비할수 있을까? 하지만 무더운 남쪽 지방의 삼은 껌질이 두꺼운. 만큼 가는 실올로 쪼개는데 한도가있다. 더구나 삼밭에 모기가 극성해서 삼대의 진을 빨아먹노라 홈집을 만드는 까닭에 섬유를 토막짓는 폐단마저 겹쳐있다. 바꿔말하면 함북의 삼은 껍질이 얇고 모기의 피해도 적다. 바로 재료상의 이같은 차이 때문에 영호남의 세포는 9새가 고작인데 육진의발이내포쯤이면 보름새에 미치었다고 한다. 요즘까지 강포(강원도견)를 버금으로 꼽는 것은 그런 지역성에 연유한다.
『넉새 농포라면 여름내 혼자서도 10필을 짜고 들이서 하면 30필도 짜는데 8∼9새가되면 손이 더뎌서 두세필 낳기가 어렵네요. 요샌 기껏해 상포로 쓰느라 싼 것만 찾지, 비싼세포를 누가 알아줄랑가요?』 8∼9새 세포는 도포도 짓는, 비단처럼 여기는 것이고 보통 입성은 중포다. 4∼5새학포는 농사 일꾼용의 거친 삼베인데 근래엔 상포라 하면 으례 이것이다.
말로는 12새 삼베도 있다고 하지만 전남에서 나는 삼으로는 현재의 세포 이상 곱게 나올수가 없노라고 했다. 역시 재료상의 문제다. 북포라면 몰라도 남쪽에서 나는 마피의 한계일는지 모른다.
더 큰 문제는 여름에도 삼베옷 입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샛수가 아주 적은것은 10만원도 하니까 그런대로 상포로 소비되는 물량이 적지 않지만 40만원짜리 세포에 이르면 모두 고개를 돌린다. 여성들의 그 값비싼 패션작품에 세포가 쓰임직도 하건만 아무도 수직의 공력과 자연스런 때깔을 눈여겨 보려 하지 않는 것이다.

<품앗이할 이웃없어>
국가적인 입장에 특별한 솜씨꾼으로 지정, 보화하고. 다소 생계비를 보태주는 이유는 좋은 솜씨를 모범이 되도록 유지시키고 나아가 진상품시절의 수준까지 이끌어 올리려는데 의도가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최근의 경제적 부흥으로 말미암아 질좋은 물건에 대한 선호도가 좀 높아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뿌리깊은 외제병 때문에 내것을 하찮게 여기는 고질은 좀처럼 나아질기미가 없다.
『그 대마촌가 하는 것 때문에 경작하려면 미리 허가받도록 하니께 귀찮고 누가 삼심을랑가요? 곡식 보담이야 삼하는게 낫지만… 인잔 베틀도다 없애삐려 이웃에 하나 품앗이할 김이 없네요.』
고래로 길쌈은 집단적인 여공이다. 작업자체가 혼자서 하기에는 너무 따분한 점에도 이유가 있지만 다른 일면에는 협업적인 요소가 많은 일이다.
삼껍질을 쪼개고 삼는 일 (올을 잇는 작업) 은 기초척인 과정에 속한다 하더라도 나는 일(실을 10올씩 잡아 날말에다 걸어서 1필 분량으로 서려놓는일)과 매는 일 (몇새를 결정해 실을 바디에 끼우고 풀먹여 도투마리에 감는 일) 은 마을에서도 명수를 초빙해다 부탁하는 것이다. 도리어 짜는 일은 원로와 풋나기의 차이가 있을망정 그런대로 독자적인 작업이다. 사실 길쌈이 한창 성하던 시절에도 전과정을 다할 줄 아는 사람은 한 마을에서 「다섯 손가락내」였다.
신라에서 삼베길쌈을 장려하기 위하여 부녀자를 두패로 나눠 7월보름부터 짜기 시작하면 8월한가위에 우열을 가려 상을 내렸다는 이야기는 단순히 경쟁심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공개적인 공동작업을 통하여 솜씨 좋은 원로들이 세세한 기능의 체험을 두루 보급하기 위한 교육수단이었다는 측면도 충분히 감안됐음에 틀림없다.
조선시대 후기의 실학자 정다산은 농업 생산의 분업화를 구상하면서 길쌈에 관하여 언급하였다. 다산의 생각은 일반농가의 부업 상태로는 기술의 개량을 기대하기 어려우므로 이젠 전적으로 길쌈만 하는 직조업의 필요성을 주장하는데서 비롯되었다. 그의 전문 직조업이란 것을 분석해보면 신라의 길쌈대회처렴 솜씨를 한데로 집약시켜 상부상조하게 하는 2중의 효과를 엿볼 수 있다.

<나일론교직 안될말>
근래까지 잔존하는 삼베고장역시 지역단위로 집중돼 있는느낌이 없지 않다. 보성의 복내·문덕과 화순의 동복지역, 진주의 수곡·곤명과 해남지역, 안동의 임하·서후지역, 삼척·울진지역등이 그러하다. 김씨할머니가 사는 석곡도 지금은 동복권의 한 잔영이다. 불과 산넘어 80리 거리여서 동복에서 좋은 재료를 구해다 쓰는 형평인 것이다.
『덜레덜레 해가지고는 가는베못하네요. 애가 터져서 못한답디여. 아무리 배우려 해도 성질이 찬찬해야지, 황새 같은 도투마리 늙으신네 병환인가 용두머리 우는 소리 요내 가슴 에는구나…소리 있잖습디여? 그래질쌈을 「애삼」이라는 것이고 시집살이 인종지덕을 거기서 삭힌거라 하대요.』
가는 베를 짜려면 온 정신을집중시켜야 한다. 딴 생각한만큼 표가 나기 때문에 정신이 맑아야 하고 또 힘이 있어야 한다.
그래도 삼베일은 농촌의 60∼70대 여성들이라면 대체로 짜 본 경험을 갖고 있다. 현재로선 소멸되기야 하겠느냐고 낙관하지만 그들 세대가 훌쩍 떠나고 난뒤 과연 얼마나 계승될수있을까. 그것은 매우 부정적이다. 더구나 「생계추리」라 일컫는 안동포의 경우 점차 생낳이 (생포)를 입는 사람들이 적어져 직조량도 극소화됐다는 소식이다.
또 일부에서는 반자동화한 직조기를 차리고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염가를 위한 속임수로 나일론사 혼방직이 횡행한다. 삼베는 가볍고 수분흡수가 잘되면서 몸에 안 붙는데 특징이 있는 것. 삼과 나일론은 교직도 혼방도 허용될수 없는 것인데 허술한 사회풍조에 편승해 서슴없이 몹쓸짓들을 벌이는 판국이다. 그릇된 풍조가 이것뿐이랴만 수의에 나일론이 들어가 엉켰다고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하지 않을수 없다. 글·사진 이종석(중앙일보 호암갤러리관장 문화재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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