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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CoverStory] 뜨락의 매향…이 봄이 끝이 아니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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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 남사마을의 670여 년 된 원정매

아니라고요? 매화가 만발한 매실농원을 찾으신 적이 있다고요? 거기서 산기슭을 흐드러지게 뒤덮은 매화를 보셨다고요?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곳에서 숨 막히는 매향을 만끽하셨겠네요. 그런데 사군자의 매화는 그런 매화가 아닙니다. 옛날에는 매화가 그리 흔한 나무는 아니었어요. 요즘 농원에서 재배하는 매화는 모두 개량종입니다. 옛 그림과 옛 글에 나오는 매화는 사대부집 뜰 앞의 한 그루, 혹은 동네 초입의 두어 그루가 고작이었습니다. 아니면 산 속 깊은 곳, 눈밭에서 피었던 '설중매(雪中梅)' 정도였죠.

추운 겨울, 선비들은 발목이 푹푹 잠기는 눈 속을 헤치며 이 매화를 찾아갔다 합니다. 또 그걸 즐겼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봄마다 피는 꽃인데도, 매화의 무엇이 그리 각별했을까요. 이번 주 week&은 그런 매화를 수소문했습니다. 전국에 내로라하는 매화는 현재 10그루가 있습니다. 그 중 7그루가 경남 산청에 있지요. 짧게는 100년, 길게는 700년 가까이 나이를 먹은 고매(古梅)입니다. 아직도 꽃이 핀답니다. 허둥지둥 짐을 챙겼습니다. 꽃이 떨어지기 전에, 매향이 묻히기 전에 week&은 그 뜰에 서고 싶었습니다.

<산청> 글=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산청 남사마을

제아무리 가난한들 향기를 돈바꿈하랴

1 노산매(蘆山梅)

문익점의 민초 사랑 기리며

아침 일찍 서울을 떠났습니다. 산청은 더 이상 첩첩산중 '오지'가 아닙니다. 대전~진주 간 고속도로를 타니 네 시간 만에 산청 땅을 밟았습니다. 휴게소에서 국밥 한 그릇을 만 시간을 빼면 그보다 짧은 거리죠.

먼저 찾은 매화는 '노산매'입니다. 바로 앞에는 문익점 선생을 모시는 도천서원이 있습니다. 고려 말 중국에서 몰래 목화씨를 들여왔던 분이죠. 그 목화씨를 뿌린 시배지가 이곳 산청에 있습니다. 150년가량 묵은 노산매는 민초를 아끼던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후손이 심은 것이라고 합니다.

당시 고려의 백성들은 한겨울에도 삼베 한 장만 달랑 걸쳤다고 하네요. 그것도 형편이 나은 사람들 얘기였죠. 가난한 민초는 칡넝쿨 껍질을 벗겨서 얼기설기 엮은 '갈포'를 입었답니다. 찬 바람이 뼛속까지 숭숭 들어오는 마대와 같은 옷이었죠. 600~670년 전, 겨울은 훨씬 혹독했겠죠. 바깥 출입 자체가 고통이었을 겁니다. 그러니 목화로 만든 무명옷이 얼마나 따뜻했을까요. 요즘으로 따지자면 '오리털 파카'인 셈이었죠.

그래서 노산매는 더욱 애틋합니다. 발걸음을 옮겨 곁으로 갔습니다. 기품있는 매향이 코를 적십니다. 여기서 150m가량 떨어진 문익점 선생의 묘소까지 노산매의 향기가 흘러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관광용 안내자료에 담긴 노산매와 생김새가 다르네요. 한쪽으로 축 늘어진 아름다운 가지가 보이지 않습니다. 도천서원 곁에 사는 관리인 박민동(45)씨를 찾았습니다. "며칠 전, 외출한 사이에 누가 와서 가지를 쳐버렸지예. 나무를 모르는 사람이 무작정 가지치기를 해버린 거라예." 뿌리에서 올라오는 새로운 가지까지 잘려 있었죠. 자세히 보니 노산매는 밑동도 썩기 시작했더군요. 빨리 손을 써야 할 판입니다. 그런데 산청군 차원의 보살핌은 전혀 없다고 합니다.

2 정당매(政堂梅)

조선왕조 흥망 함께한 고목

통일 신라 시대, 산청에는 '단속사'란 큰 절이 있었죠. 절을 한 바퀴 돌고나면 짚신이 다 해질 만큼 규모가 컸다고 합니다. 또 절 안에 있었던 불상 수만 500개, 모두 생김새가 달랐다니 참 대단하죠. '산청 3매'의 하나로 꼽히는 정당매는 바로 이 단속사 터(단성면 운리 탑동)에 있습니다. 절은 이미 불탔고, 지금은 1000년 고찰의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그곳에 570살 먹은 매화가 있습니다. 조선 초 대사헌까지 지낸 강희안(1419~64)이 직접 심은 매화라고 합니다.

예사롭진 않네요. 조선 왕조의 세월만큼 나이를 먹은 매화죠. 매화를 심을 당시, 강희안은 '고시생'이었다고 합니다. 형과 함께 단속사에 들어와 과거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네요. 그는 급제를 기원하며 이 매화를 심었을까요? 나중에 의정부의 '정당문학'이란 벼슬에까지 오르자 사람들은 이 매화에 '정당매'란 이름을 붙였습니다.

고목에서 핀 꽃은 남다르네요. 오랜 세월을 견딘 흔적이 역력합니다. 강희안은 온화한 성품에 말 수가 적었으며, 청렴하고 소박했다고 합니다. 매화의 기품과 꼭 닮았습니다. 선비들은 매화를 '지조'의 상징으로 여겼죠. '아무리 가난해도 매화는 일생 동안 향기를 돈과 바꾸지 않는다'(梅花一生寒不賣香)는 옛말도 있습니다. 세조 때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의 호는 '매죽헌'(梅竹軒)이었죠. 옛말처럼 그는 죽음 앞에서도 매향을 팔지 않았습니다.

산청의 매화 가운데 보호수로 지정된 것은 딱 한 그루, '정당매' 뿐입니다. 그나마 관리를 받고 있는 셈이죠. 그런데 매화 둘레에 친 쇠사슬 울타리는 '옥에 티'입니다. 산채비빔밥에 생선이 들어간 기분입니다. 찜찜하네요. 앞에 선 표석도 너무 높아 매화를 가립니다. 표석이 주인인지, 매화가 주인인지 헷갈릴 지경입니다.

3 야매(野梅)

밭둑에 우뚝…잡초의 생명력

정당매에서 위쪽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갔습니다. 밭두렁에는 쑥이 쑥쑥 올라와 있네요. 5분쯤 가니 밭둑에 매화가 한 그루 서 있습니다. 바로 '운리 야매'입니다. 운리 마을에 있는 야생 매화란 뜻이죠. 이 매화는 '사대부 매화'와 다릅니다. 누가 심었는지, 언제 심었는지도 모르죠. 전문가들은 150~350년쯤 된 매화라고 추정할 뿐입니다.

뜰 안의 매화가 '선비'라면, 들판의 야매는 '민초'입니다. 선비는 홀로 꼿꼿하지만, 민초는 서로 살을 비비며 살아가죠. 고상하게 크라고 가지를 친 적도, 더 높이 크라고 거름을 준 적도 없습니다. 지리산 웅석봉 줄기 아래서 비바람에 온몸을 맡긴 채 자란 셈이죠. 그래서 운리 야매는 강인합니다. 가지와 가지가 서로 엉킨 채 그 오랜 세월을 견뎠습니다.

그 앞에 섰습니다. 잡초 같은 생명력이 뼛속까지 전해오네요. 산청군의 이영복 문화관광해설사는 "매화가 활짝 피면 하나의 거대한 꽃다발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집에서 고이 키운 매화와 전혀 다른 야생의 맛"이 있다는군요.

그런데 운리 야매도 밑둥치가 썩고 있습니다. 아쉽네요. 밭둑에 선 매화라 충분한 거름을 얻기도 힘이 듭니다. 산 속에 있다면 낙엽이 썩어 부엽토라도 될 텐데요. 비료 때문에 논.밭의 토양은 갈수록 산성화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두면 소중한 야매 한 그루를 또 잃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4 남명매(南冥梅)

'칼 찬 선비'를 닮은 꽃잎

'칼을 찬 선비'. 누군지 아세요? 바로 남명 조식(1501~72) 선생입니다. '실천 유학'의 대가였죠. 그의 제자들은 임진왜란 때 직접 칼을 들었습니다. 그가 예순한살에 둥지를 튼 곳이 이곳 산청입니다. 지리산이 보이는 자리에 산천재를 지어 제자들을 키웠죠.

문을 열고 들어서니 놀랍습니다. 텅 빈 뜰에는 매화 한 그루만 서 있습니다. 그게 바로 '남명매'입니다. 매화를 둘러싼 깊숙한 공간에 동양화의 여백미가 뚝뚝 묻어납니다. 그 속을 걸었습니다. 이 작은 뜰 안에 온 우주가 꽉 찬 듯합니다.

그때 갑자기 바람이 세게 불었습니다. 모자가 '휙휙' 날아갈 만큼 센 바람이었죠. 그런데 남명매에선 단 하나의 꽃잎도 떨어지지 않더군요. 깜짝 놀랐습니다. 벚꽃이라면 '후루룩'하고 순식간에 바람이 꽃잎을 훑었을 텐데 말이죠. 매화의 꽃잎은 얇습니다. 살결도 여리죠. 그런 힘이 대체 어디서 나왔을까요.

산천재 툇마루에 앉았습니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지리산 천왕봉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산천재의 기둥을 유심히 보세요. 기둥마다 남명 선생의 한시가 한 구절씩 담겨 있습니다. 벼슬을 마다하고 이곳에 거하면서 적었던 시죠.

봄 산 어디엔들 아름다운 꽃이 없겠는가 (春山底處无芳草)

내가 여기다 집을 지은 이유는 다만 하늘이 가까워서다 (只愛天王近帝居)

빈손으로 왔으니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 (白手歸來何物食)

은하가 십리나 되니 먹고도 남겠네 (銀河十里喫猶餘).

산천재 바로 앞에 흐르는 덕천강을 '은하수'에 비유했네요. 그 은하수를 흠뻑 적시는 게 바로 남명매의 매향입니다.

5 원정매(元正梅)

670여 년 국내 최고령 매화

산청군 남사리 예담촌으로 갔습니다. 매화 일곱 그루 중 세 그루가 이 마을에 있습니다. 높다란 토담과 기품있는 고택, 세월이 얹힌 기와가 예사롭지 않네요. 먼저 정씨 고가로 갔습니다. 낭패입니다. 정씨매는 수년 전에 이미 숨을 거두었다고 하네요. 바삐 최씨 고가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대문을 열었습니다. 웬일입니까. 나무는 있는데 꽃이 안 보입니다. 인기척을 듣고 이웃에서 조영래(64)씨가 왔습니다. "작년만 해도 꽃이 무성했는데 올해 그만 죽어버렸어요. 서울에 사는 주인은 나무를 베어 버리라고 하는데 차마 못 베겠어요." 그는 수십 년 동안 최씨매에서 피는 매화를 봐 왔다고 합니다. "다른 나무를 심을 때까지만이라도 이 나무는 그냥 두려고요. 영~섭섭해서, 도저히 손을 못 대겠어요."

산청의 고매가 일곱에서 다섯 그루로 확 줄었네요. 큰일입니다. 얼른 원정매가 있는 하씨 고가로 갔습니다. 원정매는 무려 670년이나 된 매화입니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매화죠. 뜰 안으로 들어서자 원정매가 보입니다. 꽃부터 찾았습니다. 매화가 보이네요. '휴~우'하고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꽃이 피었으니 나무가 숨을 쉬고 있는 거죠. 그런데 꽃이 풍성하진 않습니다. 본 가지에선 꽃봉오리가 맺다 말았네요. 이러다 국내 최고(最古)의 매화가 죽을까봐 걱정입니다. 남사리 박우권(58) 이장은 "지난해에는 꽃이 만개했는데, 내년은 기약할 수도 없는 처지"라며 "정부에서 '보호수'로 지정하든지, 보다 전문적인 보살핌이 절실하다"고 말했습니다.

어둠이 내렸습니다. 툇마루에 걸터 앉았습니다. '감탄 반, 한숨 반'으로 원정매를 바라봤죠. 고려 말, 원정공 하즙 선생이 이 매화를 심었습니다. 이후 하씨 집안은 대대로 세도가였습니다. 고을 원님이 부임하면 먼저 이 집으로 인사를 하러 왔었다네요. 집 앞에는 '하마비'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옛날에는 열두 대문이 있던 저택이었지예. 감히 집 안에 들어갈 엄두도 못 냈다 아닙니꺼"라며 "매화를 꼭 살려야 할 텐데"라며 걱정했습니다.

매화의 향기는 '암향(暗香)'이라고 부르죠. 삼라만상이 잠드는 밤, 어둠 속에서만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고 합니다. 시각과 청각, 다른 감각을 모두 닫으란 얘기죠. 깜깜한 밤이네요. 산청의 밤하늘은 맑고 찹니다. 별이 그냥 뚝뚝 떨어질 것 같네요. 눈을 감았습니다. 아하! 그제야 알겠습니다. 매향은 코가 아니라, 마음을 적시는 향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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