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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과거를 잊으셨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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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같은 개념을 공천자인 한나라당에 들이대면 어떨까.

한나라당이라면 무조건 찍어줄 사람은 30%를 오르내린다. 하지만 표를 절대 안 줄 비토율(거부율)은 이 수치를 웃도는 것으로 조사된다. 말하자면 스스로 물갈이 대상인 셈이다. 정당 지지율만 믿고, 비토층을 끌어오는 노력을 게을리하면 대선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구조란 얘기다. 열린우리당도 상황은 비슷하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 허동원 연구조정실장은 "열린우리당이 무조건 좋다는 사람보다 무조건 싫다는 사람이 많다"고 소개한다.

양상이 닮았는데 대선 필패론은 한나라당에서만 나오는 단골 메뉴다. 급기야 당내 의원모임이 주최한 토론회에선 "한나라당엔 대선필패 법칙이 작동 중"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왜 그럴까. 무엇보다 이슈를 만들고, 정책으로 연결하고, 국정 운영의 큰 그림을 보여주고, 그림을 정치적 메시지로 바꾸는 데 한나라당이 게으른 탓이다. 어차피 한나라당이 그냥 좋다는 사람은 열린우리당이 그냥 싫다는 사람과 연결되는데도 한나라당 목소리는 줄곧 반DJ(김대중)로 향했고, 반노(노무현)에 고정돼 있다. 남북문제가 그랬고, 양극화가 그랬다.

한나라당엔 뼈아픈 경험이 있다. 2002년 대선 패배 얘기다. 그해 3월 한국갤럽은 대선 예비주자 11명의 이미지를 조사했다. 주자들이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경제발전, 교육 개선, 남녀차별 감소, 부패 감소, 정치안정, 남북관계 개선, 지역감정 완화 등 7개 분야의 국정 전망을 유권자에게 물었다. 당시 이회창 후보는 경제발전에서만 노무현 후보를 앞섰다. 나머지 '나랏일'은 노 후보가 이 후보를 압도했다. 같은 회사의 2개월 전 여론조사에서 이 후보는 31.6%, 노 후보는 1.6%의 지지율을 기록했음에도 말이다. 1개 이슈에서 1등 한 31.6%는 6개 이슈를 먹은 1.6%에 1년 뒤 패배했다. 물론 우여곡절이야 많았지만 말이다.

다시 대선을 앞뒀지만 한나라당은 그 타령이다. 경제든, 안보든, 지방문제든 청사진이 없다. 지지율은 앞서고 이슈에선 뒤지는 양상도 4년 전과 유사하다.

2004년 17대 국회가 구성되자 한나라당은 '공동체 자유주의'를 경제해법으로 내놨다. 하지만 2년이 지나도 정책으로 연결시켰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는다. 북한 핵문제가 10년 이상 탈출구를 못 찾는데 당 내엔 전문가 한 명 찾아보기 힘들다. 지방선거를 앞뒀다면 당이 생각하는 지방자치가 무엇인지 밝히고 이에 맞춰 후보를 골라야 한다. 그러나 공천 현장엔 당원협의회 운영위원장(옛 지구당위원장)이 자신을 공천하는 '자천 공천'이 여럿이고, 위원장들끼리의 나눠먹기가 횡행한다. 심지어 대통령이 '좌파 신자유주의 정권'이라고 말해도 별 대꾸가 없다.

한나라당은 17대 총선 후 네 차례의 의원 연찬회를 열었다. 그때마다 '웰빙 정당'의 꼬리표를 떼겠다고 다짐했다. "확 바꾸겠다"고도 했다. 그럼에도 의원들의 일탈 행동은 꼬리를 물었다. 최연희 의원 성 추행 사건까지 나오자 이번엔 의원들이 가나안 농군학교로 향했다. 금욕 수련회를 자청한 자세야 나쁠 게 없다. 긴장감 유지를 위해 정례화할 것을 제안하고 싶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게 있다. 수련회의 다짐을 이어가는 일이다. '나랏일이라면 한나라당이 최고'라는 믿음을 줘야 집권할 것 아닌가 말이다.

최상연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