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이 성추행 교수 사건 파기환송한 까닭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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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이 성희롱 관련 소송을 심리할 때 가해자나 일반인의 시각보다 피해자의 심정과 처지를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는 대법원의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2부(주심 권순일 대법관)는 12일 여학생 성희롱 의혹으로 해임당한 대학 교수 A씨가 교원소청심사위원회를 상대로 낸 해임 취소 소송에서 “A교수의 행동을 성희롱으로 보기 어려워 해임이 정당하지 않다”고 판단한 2심 판결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추천서 부탁한 학생에게 “뽀뽀해주면” 발언해 해임

'미투' 운동이 본격화한 가운데 대법원이 성희롱 관련 소송 심리에서 법원이 피해자의 처지를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놨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련 없음) [중앙포토]

'미투' 운동이 본격화한 가운데 대법원이 성희롱 관련 소송 심리에서 법원이 피해자의 처지를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놨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련 없음) [중앙포토]

A교수는 2015년 4월 자신이 가르치던 여학생이 추천서를 부탁하고 연구실로 찾아오자 ‘뽀뽀해 주면 추천서를 만들어 주겠다’고 말하는 등 성추행 의혹이 제기돼 해임됐다. 수업 도중 학생을 뒤에서 껴안는 자세를 한 것도 문제가 됐다.

그는 해임처분이 부당하다며  교원소청심사위에 소청을 제기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법원에 해임 취소 소송을 냈다.

1심은 A교수의 행동이 성희롱에 해당한다며 학교 측 처분이 타당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2심은 “대화의 전후 문맥 등을 보면 일반적ㆍ평균적인 사람의 시각에서 봤을 때 성희롱으로 보기 어렵다”며 A교수의 손을 들어줬다.

“평소 학생들과 격의 없이 농담, 성희롱 아냐”…뒤집힌 2심

2심에서 A교수는 “’뽀뽀 발언’이 장애인 교육 아르바이트 추천서를 써달라고 찾아온 학생들에게 봉사와 희생정신이 필요하다는 걸 설명하는 취지였다”고 주장했다. 그는 “‘장애인 아동들을 가끔 안아주고 뽀뽀도 해주어야 하는데 가능하냐’라고 말한 뒤 ‘우리 조카들은 고마우면 나한테 뽀뽀를 하는데 너희도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고 주장했다.

2심 재판부는 A교수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재판부는 ”A교수는 평소 학생들과 격의 없고 친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농담이나 연애상담도 자주 나눴다“며 “여학생이 교수의 말 때문에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느꼈을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보았다.

A교수가 여학생을 뒤에서 안는 자세로 수업해 성추행했다는 것도 정당한 징계사유가 아니라고 봤다. 재판부는 “실습실이 비좁아 A교수가 학생의 모니터 화면을 보기 위해 뒤편에 설 수밖에 없었고, 키보드를 타이핑하려면 학생의 옆이나 뒤에서 손을 뻗어야 하는 자세가 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A교수로부터 비슷한 방식으로 성희롱과 추행을 당했다는 다른 여학생들의 진술은 “신빙성이 없다”며 증거로 채택하지 않았다. 문제가 터지기 전까지 A교수와 계속 친분을 유지하며 소극적으로 행동했다는 이유였다.

대법원 “2차 피해 등 피해자 처지 충분히 고려해야”

대법원 전경 [연합뉴스]

대법원 전경 [연합뉴스]

하지만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은 2심 재판부가 “피해자들이 처한 특별한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은연중에 가해자 중심적인 사고와 인식을 토대로 평가를 내렸다”며 “성희롱은 사회 전체의 평균이 아니라 피해자와 같은 처지에 있는 평균적인 사람의 입장에서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느낄 수 있는지를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했다.

이어 대법원은 2심 재판부가 상대가 학생들에게 취업 등에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교수라는 점, 학생들이 2차 가해 등을 두려워해 소극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는 점, 이런 행동이 빈번하게 이뤄진 점 등을 가볍게 여겼다고 지적했다.

'가해자 중심' 벗어나…여성변호사회 "적극 환영"

이번 판결은 한국 사회 ‘미투’ 운동이 본격화된 상황에서 법원이 성희롱 사건을 다룰 때 보다 세밀한 성 감수성을 요구한 것으로 풀이된다. 대법원은 “성희롱 사건에서 2차 피해 등 피해자가 처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해 심리해야 한다는 기준을 제시한 최초 판결”이라고 밝혔다.

한국여성변호사회는 다음날인 13일 "대법원의 판결을 적극 환영한다"는 성명서를 냈다. 여성변호사회는 이번 판결을 "향후 성희롱 관련 소송에서의 심리와 판단이 남성 중심의 성(性)고정관념에서 탈피하여 양성평등의 시각에서 판단되어야 한다는 획기적인 기준점을 제시한 것"이라고 평가하면서 "앞으로 성폭력피해자가 재판 과정에서, 우리 사회에서 가해자 중심의 인식에서 비롯되는 부당한 피해에서 벗어나는데 큰 힘이 될 것이다"고 했다.

박사라 기자 park.sar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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