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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주인인가. 아니면 종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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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저희 집 마루에 액자가 하나 걸려 있었습니다. 굵직한 붓으로 쓴 글귀가 담겨 있었습니다. 당시 초등학생이던 저는 아무것도 모르고, 오다가다 그 글귀를 봤습니다. 어느날 아버지께 물었습니다.

“저 글을 어떻게 읽어요?”  

“사자굴중무이수(獅子窟中無異獸).”

“무슨 뜻이에요?”

“사자 굴에는 다른 짐승이 있을 수가 없다.”

그런가 보다 생각했습니다. 중학생이 되면서 ‘저게 무슨 뜻일까? 궁금해지더군요. ‘사자굴에는 다른 짐승이 살 수가 없다. 당연하지. 사자굴에 다른 짐승이 살다가는, 당장 사자밥이 되고 말 테니까. 그런데 왜 저 글을 집에다 걸어 놓은 거지? 뭔가 교훈적인 의미라도 담겨 있나?’

저는 잠시 궁리했습니다. 그러자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아, 그러니까 여기가 사자굴이란 말이지. 사자굴에는 사자만 사니까, 나쁜 액운이나 이런 게 우리집에 들어오지 말라는 뜻이구나. 그러니까 나쁜 일이 생기지 말라고 겁을 주는 액자네.’
중학생이었던 저는 그렇게만 생각했습니다.

붓다가 가섭에게 꽃을 든 까닭은?

백용성(1864~1940) 선사를 아시나요? 그는 독립운동가입니다. 만행 한용운과 함께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입니다. 3ㆍ1 독립만세운동이 가능하게끔 배후에서 떠받쳤던 인물입니다. 수행의 안목도 그만큼 또렷했다고 하지요. 백용성 선사가 어느날 제자 고암 스님(1899~1988, 훗날 조계종 종정 역임)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부처가 가섭에게 연꽃을 들어 보인 까닭이 무엇인가?”

용성 선사는 단도직입적으로 ‘선의 칼’을 들이댔습니다. ‘부처가 제자들 앞에서 아무 말 없이 연꽃을 들어 보인 것이 무슨 뜻이며, 또 제자 가섭이 그걸 보며 미소를 지은 까닭은 무엇인가.’ 이렇게 다그친 겁니다. 다시 말해 “네가 부처의 뜻을 아느냐? 네가 가섭의 뜻을 아느냐? 안다면 그게 무엇이냐?”라고 직설적 물음을 제자에게 꽂은 겁니다. 이 말을 들은 고암 스님이 답을 했습니다.

“사자굴에는 다른 짐승이 있을 수 없습니다(獅子窟中無異獸).”  

이런 대답을 들은 용성 선사의 반응이 궁금하지 않으세요? 과연 어땠을까요. 용성 선사는 그 답을 듣고서 제자의 깨달음을 인가했습니다. 그리고 전법게를 건네며 법맥을 잇게 했습니다.

나의 사자굴은 어디인가

저는 우연히 책장을 넘기다가 백용성 선사와 고암 스님의 일화를 만났습니다. 고암 스님의 답에서 ‘사자굴중무이수’라는 대목이 나왔을 때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어릴 적부터 봐왔던 액자, 마루에 늘 걸려 있던 액자에 담긴 글귀였거든요. 거기에 그토록 깊은 뜻이 담겨 있을 줄은 몰랐거든요. 더구나 ‘사자굴중무이수’라는 답을 듣고서 용성 선사가 제자의 깨달음을 인가했다고 하니, 그 액자의 글귀는 분명 깨달음의 문을 여는 문고리인 셈이지요.

저는 눈을 감았습니다.

 ‘사자굴에 다른 짐승이 있을 수 없다는 건 나쁜 액운을 쫓아낸다는 뜻이 아니구나. 대체 무슨 뜻일까. 왜 ‘사자굴’이라고 했으며, 또 사자굴에는 다른 짐승이 없다고 했을까. 용성 선사의 물음에 고암 스님은 왜 이 글귀를 내밀었을까. 또 이 말을 들은 용성 선사는 왜 고개를 끄덕였을까.’ 

이런 물음이 제 안에서 강하게 올라왔습니다.

여러분은 ‘사자굴’하면 무슨 생각이 드시나요? 맞습니다. 살고 싶어도, 살 수가 없는 곳입니다. 우리에게도 저마다 그런 사자굴이 있습니다. 거기가 어디일까요?

어떤 사람에게는 아주 호사스러운 주상복합 고층 아파트입니다. 또 누구에게는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해외 유명 대학의 졸업장입니다. 아니면 다들 다니고 싶어하는 고액 연봉의 번듯한 직장입니다. 그도 아니면 각박한 일상을 훌쩍 떠나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태평양 바닷가의 휴양지입니다.

미생의 삶-청년도, 회사원도 

요즘 청년 세대들의 삶이 힘겹습니다. ‘88만원 세대’라고 하지요. 취업난에 아르바이트를 이어가며, 결혼하기도 어렵고, 결혼을 해도 아이를 키우기가 어렵습니다. 비단 청년들뿐일까요. 아등바등 회사 생활을 하는 직장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들 “나는 미생(未生)이야”라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나는 토끼야, 나는 달팽이야. 나는 까치이거나 염소야. 아님 고양이든지. 사자 근처에는 갈 수도 없어. 설사 굴 안에 들어간다고 해도 순식간에 잡아 먹히고 말아. 우리는 살아서 나올 수가 없어.’

이렇게 자책하며 살아갑니다.

저는 가만히 물어봅니다.
‘그럼, 그런 꿈들이 이루어지면 미생이 아니라 완생(完生, 완성된 삶)이 되는 걸까. 대리에서 과장이 되고, 부장이 되고, 임원이 되고, 사장이 되면 미생에서 벗어나게 될까. 절대 갑(甲)의 자리에 서면 정말 달라질까. 대기업의 회장이 되면 삶의 애환으로부터 자유로워질까.’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설령 대기업의 오너라고 해도 그런 방식을 통해서는 미생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럼 어떡해야 할까요. 어떡해야 미생의 삶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어떡해야 사자굴에 들어갈 수 있을까. 거기서 살 수가 있을까요.

붓다는 꽃을 들며 우리에게 말합니다.

“네가 바로 꽃이야!”  

이어서 또 말합니다.

“진흙에 물들지 않고 피어나는 꽃. 네가 바로 그 연꽃이야.”  

이 말을 들은 우리는 어리둥절합니다.
‘내 삶은 온통 진흙투성이인데, 내가 꽃이라니. 왜 내가 연꽃이지?’
이렇게 반문합니다. 그래도 부처는 계속 말합니다.

“네가 바로 연꽃이야. 네 옆의 사람도, 네 뒤의 사람도, 이 산도, 저 강도, 온 세상이 온통 그렇게 피어 있는 연꽃이야!”  

그렇게 거듭거듭 강조합니다.

고암 스님의 답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산과 이 들과 이 우주가 모두 사자굴이라고 말합니다. 알다시피 사자굴에는 다른 짐승이 살 수가 없습니다. 이 우주 전체가 사자굴이라면,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누구일까요. 대체 누구이기에 이 무시무시한 사자굴에서 이렇게 숨을 쉬며 생활하고 있는 걸까요.

나는 누구인가

바로 이 대목입니다. 이 대목을 깊이 궁리해야 합니다. 그럼 우리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바로 사자입니다. 왜냐고요? 사자굴에는 다른 짐승이 있을 수가 없으니까요.  사자굴에는 오직 사자만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자신이 바로 그 사자입니다. 이 굴의 주인입니다. 미생인 줄 알고 살아온 우리 각자가 연꽃이고, 우리 각자가 사자입니다.

어릴 적부터 수도 없이 바라봤던 액자 속의 글귀가 이렇게 소리칩니다.
‘네가 바로 사자다. 네가 사는 이곳이 바로 사자굴이다. 네가 그 주인이다. 이 굴의 주인이다.’

이제 심호흡을 하고 크게 한번 울부짖어 보세요.
“어~흥!”
사자의 포효가 들리나요? 이 굴의 주인, 이 세상의 주인, 이 우주의 주인이 바로 나입니다. 여러분 각자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물음을 다시 던져야 합니다. 그 물음에 다시 답해야 합니다.

“나는 미생인가, 아니면 사자인가.”

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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