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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집사] #6. 나의 고양이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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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종영한 드라마 ‘마더’ 이야기다. 주인공 강수진(이보영)의 양모 차영신(이혜영)은 죽음을 앞두고 뜻밖의 선물을 받는다. 수진의 친모가 간직하고 있던 딸의 어릴 적 사진과 배냇저고리다. 수진이 여덟살일 때 입양한 영신은 자신이 본 적 없는 아기 수진의 모습을 보고 왈칵 울음을 터뜨린다.

[백수진의 어쩌다 집사] #(6) 나무를 기억하는 사람들

암 투병 중이었던 차영신 캐릭터와는 상황이 많이 다르지만 최근 나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인터넷에서 내가 입양하기 전 나무의 모습을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어쩌다 집사’ 연재에 대한 짤막한 소개 글을 올린 블로그였는데 아무리 봐도 나무를 아는 사람 같았다. 글 목록을 거슬러 올라가다 알았다. 블로그의 주인장은 바로 나무맘1님이었다.

나무맘1님은 자신의 손을 거쳐 간 동네 길냥이들의 이야기를 수년간 차곡차곡 기록하고 있었다. 그 기록 사이에서 내가 놓쳤던 날들의 나무를 봤다. 나를 볼 때와는 조금 다른 눈빛을 하고, 지금보다 작은 몸집으로 공원의 초록을 즐기는 나무.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 나무. 나무를 천천히 나에게로 인도해준 시간의 기록들이 존재도 몰랐던 인터넷 공간에 남아 있었다.

블로그 속 나무 이야기에 마침표를 찍은 건 나였다. 나무맘1님은 겨울이 오기 전 가족을 찾게 된 나무를 '복도 많은 놈'이라고 불렀다. 글을 읽으면서 드라마 속 차영신처럼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그게 어떤 감정이었는지 지금도 이해는 안 간다. 슬퍼할 일도 아니었고, 오히려 반갑고 고마운 마음이 더 컸는데 왜 눈물이 났을까. 너무 반갑고, 너무 고마워서였을까.

그래도 택배 박스를 뜯어 놓는 건 깜찍한 일. 벽지나 요가매트를 뜯을 땐 참을 인을 두 배는 더 써야 한다.

그래도 택배 박스를 뜯어 놓는 건 깜찍한 일. 벽지나 요가매트를 뜯을 땐 참을 인을 두 배는 더 써야 한다.

이런 일도 있었다. 남동생이 동네 친구와 밥을 먹다가 “누나가 최근 공원에서 엄청 예쁜 길냥이를 주워다 키우고 있다”는 얘기를 했단다. 그러자 친구가 “혹시 얘야?” 하더니 제 폰 사진첩에서 나무 사진을 보여주더라는 것이다. 일산에 길냥이가 나무 한 마리만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럴 수가. 심지어 나무가 살던 공원에서 조금 떨어진 단지에 사는 친구였다.

세상에. 나무 너… 연예인(?)이야 뭐야. 포털사이트에서 과거 사진이 검색되질 않나, 랜덤한 지역 주민이 폰에 사진을 간직하고 있질 않나. 옥주현이 데뷔 전 이효리의 사진을 지갑 속에 넣고 다녔다던 일화가 떠오르면서 새삼 우리 집 돼지, 아니 고양이의 스타성을 실감했다.

나무의 친구였던 초딩들도 빼놓을 수 없다. 나중에 알게 된 건데, 아깽이(아기 고양이) 시절은 지났지만 아직 성묘는 아닌 고양이를 ‘캣초딩’이라고 부른단다. 고양이 나이 계산법을 적용하면 7개월령이 사람의 12세 정도다. 당시엔 나무가 귀찮음을 참고 초딩들과 놀아주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정신연령이 비슷해서 잘 맞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중성화수술 직후, 나무는 서울의 내 자취방에 오기 전에 일산 본가에서 며칠간 살았다. 그때 어머니가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함께 탄 초딩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다. “여기 ○층에 나무가 산다면서요?” 대체 우리 집 층수까지 어떻게 알았지? 요즘 애들 정보력이란…. 어머니는 “잠깐 지내고 있는데 곧 서울로 이사 간다”고 알려주셨다고 했다. 그 정보 또한 금세 학교에 퍼졌을 거다. 여전히 잘 지내고 있다는 소문도 누가 내줬으려나.

나무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존재는 매일 나의 책임감을 일깨운다. 모두의 기억 속의 나무보다 지금의 나무가 불행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다. 그렇다고 내가 뭘 잘했는지는 모르겠다. 나무가 바뀐 환경에 빠르게 적응해준 덕에, 무엇이든 잘 먹고 잔병치레 없이 건강하게 지내준 덕에 지난 1년 반을 무사히 지나왔다.

나무맘1님은 가끔 연락을 주고받을 때마다 “나무 얼굴에 사랑받는 티가 난다”는 말을 한다. 이 녀석이 포만감이 적은 다이어트 사료 때문에 불만에 차 있는 건 아닌지, 집에 혼자 있는 동안 외로움에 시달려 우울해 하진 않는지 늘 걱정인 나에게 그 말은 아주 큰 격려가 된다(살이 쪘다는 말을 돌려 한 건 아니겠지?).

 나무를 한 번이라도 만났던, 나무의 이야기를 한 번이라도 들어봤던 모든 이들에게 이 글을 통해 말해주고 싶다. 벌써 세 살이 된 나무는 여전히 사랑스럽고, 그때보다 조금 더 귀엽고, 매일매일 창의적인 말썽을 부리면서 아주 잘 지내고 있다고!

※다음 화부터는 집냥이 나무의 육묘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햇살 좋은 지난해 봄날에 누나 침대 위에서 무방비 상태로 잠 든 나무. 누가 업어 가도 모를 듯.

햇살 좋은 지난해 봄날에 누나 침대 위에서 무방비 상태로 잠 든 나무. 누가 업어 가도 모를 듯.

글·그림=백수진 기자 peck.soo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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