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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쌍궤병행’ 유인하는 시진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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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북한 비핵화 이슈에 중국이 키 플레이어로 재등장하면서 남·북·미·중의 셈법이 복잡해지고 있다. 왼쪽부터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 시진핑 중국 주석, 문재인 대통령, 트럼프 미 대통령. [중앙포토]

북한 비핵화 이슈에 중국이 키 플레이어로 재등장하면서 남·북·미·중의 셈법이 복잡해지고 있다. 왼쪽부터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 시진핑 중국 주석, 문재인 대통령, 트럼프 미 대통령. [중앙포토]

“중국에는 전략적인 자신감이 있다.”

비핵화 신중론 펴며 평화체제 제안 #사드 보복 해제도 내세워 한국 포섭 #비핵화서 미국 고립시키려는 의도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전격 방중을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무렵 중국의 저명한 한반도 문제 전문가가 ‘차이나 패싱론’에 대한 의견을 묻자 걱정할 것 없다는 투로 한 말이었다. 그는 “한반도의 정세가 어떻게 흘러가더라도 북한이 중국을 적대시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럴 경우 북한 스스로의 이익을 해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란 게 그 이유였다.

중국의 자신감은 김정은 방중으로 허언(虛言)이 아님이 입증됐다. 그 이후 ‘차이나 패싱론’은 쑥 들어가고 ‘중국 역할론’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중국과의 전통 우의를 다지는 것을 ‘숭고한 의무’로 여긴다”는 김정은의 발언은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자신감을 상한가로 북돋워 줬을 것이다. ‘최대한의 압박’에 대한 피로감을 호소한 전통 우방국을 그는 ‘최대한의 성의’로 포용했다.

냉전이 종식된 뒤 중국에 북한은 양면적 존재였다. 자국의 영향력이 미치는 나라가 한·미·일 해양세력과의 접점에 버티고 있다는 사실은 커다란 전략적 자산이었다. 또 주한미군 철수 등 향후 동북아시아에서 미국의 영향력 축소를 위해서도 북한의 가치는 크다.

반면 북한이 핵·미사일 도발을 거듭할 때에는 전략적 부담으로 작용했다. 북·중 관계가 피로 맺은 혈맹이자 순망치한(脣亡齒寒)인 관계, 즉 ‘특수 관계’와 한·중 관계와 다를 바 없거나 그보다 못한 ‘정상적 국가 간 관계’ 사이를 오락가락한 이유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은 지난달 25일부터 나흘간 중국을 비공식 방문했다. 사진은 26일 김 위원장이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중국군 의장대를 사열하는 모습. [AP=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은 지난달 25일부터 나흘간 중국을 비공식 방문했다. 사진은 26일 김 위원장이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중국군 의장대를 사열하는 모습.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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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상황에 따라 편의적으로 둘 중 어느 한쪽을 강조한 측면도 있다. 이번 김정은 방중 때 최대한의 의전과 수사로 전통 우호를 부각한 것도 양국 관계 자체의 변화라기보다는 쌍방의 필요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이 전략적 부담을 가장 강하게 느끼기 시작한 건 한반도 전쟁 위기가 고조되면서였다. 시 주석은 “대문 앞에서의 소란을 용인할 수 없다”고 경고하면서 미국의 대북제재 강화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중국이 역할을 했든 하지 않았든 위기가 파국을 향해 치닫던 상황은 막았다. 그런 면에서 중국은 안도한다.

일거에 북핵 매듭을 끊겠다고 호언하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나 한반도의 영구 평화가 눈앞에 다가온 것처럼 낙관에 부푼 문재인 정부와 달리 중국은 현재 신중하다. 북한이 단숨에 호락호락 핵을 내놓지 않을 것이란 점도 꿰뚫고 있다.

중국은 북·미 간의 간극이 클수록 자국의 역할 공간이 넓다고 본다. 그래서 내놓은 게 ‘쌍중단·쌍궤병행’론이다. 핵 도발과 한·미 군사훈련을 동시에 중단하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고, 비핵화와 북·미 평화협상을 병행해 나가자는 것이다.

미국은 거부하지만 중국은 북한의 입장까지 감안해 균형을 맞춘 것이라 주장한다. 이미 러시아의 동의를 얻어 낸 시 주석은 김정은에게도 이를 받아들이라고 설득했다.

시 주석은 지난해 문 대통령 취임 직후 첫 통화에서 “한반도 정책에서 서로 비슷한 점이 있다”고 말했다. 쌍궤병행 해법에 한국이 동의해 올 여지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거듭된 요구에도 꿈쩍 않다가 한반도 대화 국면의 시작과 함께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관련 보복을 풀려는 자세를 보이는 것도 이런 내심과 무관치 않다.

남북한을 동시에 자국의 해결방안으로 끌어들일 경우 남는 건 미국이다.

베이징=예영준 특파원 yyjun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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