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견 없는 정치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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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6·10학생시위의 고비를 넘긴 후 정국이 다시 어느 정도안정감을 되찾으면서 국회도 이번 주 초부터는 그럭저럭 정상화되고 있다. 여-야는 그동안 끌어오던 국회법 개정협상을 타결함으로써 새 국회법에 따른 상임의원장 선출등 원구성도 곧 완결할 수 있게 됐고 이어 각 정당의 대표연설, 대정부질문 등의 순서로 임시국회는 굴러갈 전망이다.
그렇지만 아직 5공화국비리, 광주사태조사와 악법개폐 등을 위한 특위구성에는 여-야간에 진전을 보이지 않고 있고, 6·10시위의 뒤처리문제를 둘러싸고도 이견이 나오고 있다. 이런 과정에서 민정당이 제의한 4당 대표회담은 서로간의 신경전 끝에 당분간 성사되지 않을 모양이다.
13대 국회 초의 이런 정국전개에 대해 성급한 비관도 낙관도 하기 어렵지만 앞으로 정치권이 문제를 해결하고 상황을 주도해 나가자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이는 몇 가지 요청은 객관적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본다..
우선 정치권은 당장 처리해야 할 현안에 대해서는 물론 오늘날 우리사회에서 절박하게 등장하고 있는 여러 문제들, 예컨대 통일·노사·소외계층…등의 문제에 대해 나름대로 확실한 문제인식과 주 견을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이번 남-북한 학생회담 문제에서만 보더라도 정치권은 학생층의 통일의지와 그 논의의 내용, 그 활동성의 수준 등에 대한 충분한 사전인식이 없었던 것으로 보였고, 학생층이 던진 충격을 기존 자기들의 정책 틀에서 어떻게 수용해야 하는지 자신 있는 대응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 결과 학생주장에 동조하는 듯한 시준가 나오는가 하면, 반대는 하지만 혹 정치적 손실이 오지 않을까 해서인지 단호하게 반대는 하지 못하는 듯한 엇갈린 자세를 보였다.
정치권의 이런 엉거주춤한 자세는 과거 노사분규 때도 나타났고, 앞으로 또 어떤 문제에 부닥쳐 같은 모습을 보일지 알 수 없는 형편이다. 따라서 정치권은 이제부터라도 시대적 상황을 통찰하고 문제를 파악해 주 견을 확립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해 지적하고 싶은 점은 정치권이 지나치게 세론 이나 인기를 의식한다는 점이다. 이 역시 확실한 주 견을 못 가진 탓이겠지만 정치인들의 언동이 듬직하지 못하고 그때그때 여론의 추세에 맞추려는 듯이 보이는 것은 전체 정치권의 신뢰를 생각해서라도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여기서 그런 사례를 굳이 나열하지는 않겠지만 정치인의 말이 경우에 따라 내용이나 뉘앙스가 달라진 데서야 국민이 믿을 수가 없게 된다. 정치인들에게서 다소 고집스런 일면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 고집으로 일시적으로 손해보는 일도 있을 수 있겠으나 길게 보면 고집 있는 정치인이 국민 지지와 존경을 더 받게 될 것이다.
또 한가지 말하고 싶은 점은 정치 행태에 있어 본말을 구별하는 노력을 보여 달라는 것이다. 본질은 제쳐놓고 절차문제나 격, 또는 말꼬리를 잡는 식의 말싸움 같은 정치 행 태가 아직 너무 많이 나오고 있다. 본질문제에 있어 자기의견을 관철하고 더 많이 반영하는 노력이 값있는 것이지 말싸움에서이기거나 더 깊숙한 절을 받는다고 그리 득 볼 것은 없을 것이다.
4당 대표회담이 될 듯 하다가 안되고 있는 것도 정치인들이 본말구별의 노력을 별로 않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부터의 정치는 권위주의시대의 온갖 고정관념과 찌든 구 태로부터의 탈피를 불가피하게 요구받고 있으며 이 요구에 얼마나 부응할 수 있느냐에 성패가 걸려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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