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파토 인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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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파토(破土) 장군-. 중국 남부와 히말라야에 사는 포유동물 '귀 천산갑'(穿山甲)의 별칭이다. 온몸이 비늘로 덮여 있고 주로 개미를 먹고 사는 이 동물은 한 시간에 7m 가량의 굴을 팔 수 있다. 발톱으로 잽싸게 흙을 파헤치는 모습 때문에 별칭이 나왔다.

도구를 쓰지 않으면 사람은 얼마나 땅을 팔 수 있을까. 50㎝, 아니면 1m. 참호를 파본 사람이라면 흙 파기가 얼마나 힘든지 짐작할 것이다. 파고 또 파는데 좀처럼 깊어지지 않고….

전쟁.범죄 영화에는 '파토 인간'이 자주 등장한다. 극한 상황을 이겨내고 굴을 뚫어 탈출하거나 범죄에 성공하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관객들은 후련함을 느낀다. 며칠 전 타계한 찰스 브론슨과, 스티브 매퀸도 전쟁영화 '대탈주(1963년 작)'에서 파토 인간이었다.

이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수용소에서 땅굴을 파고 탈출한 영국 병사들의 얘기를 토대로 한 탈출영화의 고전이다. 연합군 포로들은 1백m의 땅굴을 파서 탈출을 시도한다.

하지만 측량 실수로 짧게 파, 철조망 못 미쳐 뚫고 나오는 바람에 갖은 고초를 겪는다. 스티브 매퀸이 오토바이로 점프해 철조망을 넘는 부분은 20세기 영화사의 명장면으로 꼽힌다.

대탈주의 영향은 최근까지 이어진다. 은행 돈을 털기 위해 금고 바닥까지 굴을 뚫는 미국 코믹물 '스몰 타임 크룩스(2000년)'와 국산영화 '자카르타(2001년)', 암탉이 농장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한다는 애니메이션 '치킨 런(2001년)', 고참 죄수가 숟가락 하나로 6년 동안 굴을 파 탈출한다는 '광복절 특사(2002년)'….

가끔 대탈주의 한 장면 같은 일들이 실제로 일어난다. 지난달 브라질 북동부 한 교도소에서는 84명의 죄수가 집단 탈출했다. 이들은 감옥에서 교도소 밖 밀림까지 무려 50m의 터널을 팠다. 5일자 모든 조간신문의 사회면에도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미군부대 담장 옆에 커피숍을 낸 뒤 영내매점(PX)까지 길이 20m의 굴을 뚫어 지하를 통해 수입 면세맥주를 빼돌린 밀수조직이 적발됐다는 것이다. 굴 바닥에 레일까지 깔았다고 한다. 하지만 욕망에 눈이 멀어 '불의(不義)의 굴'을 뚫은 사람들이 어디 이들뿐이겠나.

야서혼(野鼠婚.두더지가 좋은 집안의 혼처를 구한 것) 같은 엉뚱한 희망이 숨어 있는지 각자의 마음을 들여다 보자.

이규연 사회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