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 30㎞ 위안부 기록 디지털 자료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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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침묵, 일어서는 위안부' 재일교포 2세 박수남 감독

'침묵, 일어서는 위안부' 재일교포 2세 박수남 감독

지난 17일 도쿄의 한 소극장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소재로 한 영화 ‘침묵, 일어서는 위안부’ 상영회가 열렸다. 전쟁과 위안부 피해자 소재에 천착해온 재일동포 2세 박수남(82·사진) 감독의 네 번째 영화다.

재일동포 2세 박수남 감독

이 영화는 그가 30년 가까이 모아온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증언과 활동 기록을 편집해 제작한 것이다. 박 감독은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가 이뤄진 뒤,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그는 “정부가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멋대로 한·일 위안부합의를 체결한데 대한 분노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117분에 걸친 영화에는 1990년대 일본 정부에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할머니들의 투쟁의 역사가 생생하게 담겨있다. 할머니들은 일왕이 사는 황거 앞에 주저앉아 울부짖기도 하고, 일본 정치인과 전직 군인을 상대로 힘겨운 증언을 쏟아내기도 한다. 필름 한 컷 한 컷이 기록이고 역사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활동이 국내 집회 위주로 기록됐고 증언도 최근에서야 영상으로 보관하기 시작한 걸 생각하면 의미가 큰 영화다.

영화에는 6명의 할머니가 등장한다. 올 초 문재인 대통령의 초청으로 청와대를 방문하기도 했던 이옥선(90) 할머니도 그 중 한 명이다. 영화 속 할머니는 아직 머리가 검은 60대다. 영화에 나오는 할머니 중 현재 생존해 있는 이는 이옥선 할머니를 포함해 단 2명뿐이다. 할머니들에게 전쟁 당시 기억을 물으면 처음엔 소리가 안 나와 말을 못한다고 한다. 너무 깊은 곳에 오랫동안 담아뒀던 기억이기 때문이다. 그 침묵을 깨고 증언을 해준 기록이 바로 이 영화다.

박 감독이 위안부 피해자 관련 취재를 시작한 건 198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위안부 피해자 중 처음으로 피해 사실을 알린 고(故) 배봉기 할머니의 인터뷰가 담긴 영화 ‘아리랑의 노래, 오키나와에서의 증언’을 1991년 발표했다. 이 영화는 일본에서 20만명의 관객이 봤다.

박 감독은 “한국의 젊은이들이 이 영화를 많이 봐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우리 스스로가 역사를 잊어버리면, 이런 사실이 있었다는 것 조차 없어질 수 있다”며 관심을 호소했다. ‘침묵, 일어서는 위안부’는 서울국제여성영화제,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도 상영됐다. 일본에선 도쿄뿐 아니라 오사카, 요코하마 등에서 소규모로 상영될 계획이다.

박 감독의 향후 계획은 그 동안 찍은 촬영 기록을 디지털화해서 보존하는 것이다. 위안부 피해자 기록뿐 아니라 군함도 강제연행, 나가사키 피폭 관련 기록 등 30년 동안 쌓아온 방대한 기록이다. 필름 분량이 10만 피트(약 30㎞)를 넘는다. 1피트를 디지털화 하는 데 2만엔(약 20만원)의 비용이 든다고 한다. 국가기록원과 한국영상자료원과 협의해 정부에 기부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도쿄=윤설영 특파원 snow0@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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